이문일 논설위원

개항(1883년) 이후 인천엔 '신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서양의 신식 문물이 인천에 도착해 머문 뒤 서울로 가는 형국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이 거의 접하지 못했던 다양한 물건과 풍물 등을 인천에선 흔하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비록 일제 강점기이긴 했어도, 인천은 '화려한' 시절을 구가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인천상륙작전 때 집중포화로 수많은 건축물이 파괴됐다. 그래도 일제 침략사를 아로새긴 '근대 건축물'은 더러 살아남아 후대에 전한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철거됐거나 철거 위기를 맞는다. '역사의식'이 부족한 지자체에서 보존은커녕 헐어내기 바쁜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강화군 내 '조양방직'(강화읍 소재)은 여러 모로 시사점을 던져준다. 일제 때 잘 나가던 곳인데, 얼마 전만 해도 폐허와 다름 없었다. 그런데 고미술을 전공하고 골동품 사업을 하던 이가 2017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조양방직을 사들였다. 이어 이곳은 카페이자 문화미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여기선 커피와 케이크를 맛보고, 미술작품과 인테리어 소품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카페 조양방직'은 요새 입소문을 타고 오는 이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조양방직 이야기'를 대강 추려보자. 1933년 강화도 대지주였던 홍재묵·재용 형제가 세운 조양방직은 인천지역에서 처음으로 신식 기계를 도입해 근대적 기틀을 갖췄다. 그 전까진 수공업 형태였다. 조양은 면·마방직과 염색 등에 치중했다. 조양방직이 생기면서 당시 강화도에 전기와 전화 시설이 들어와 관심을 끌기도 했다. 얼마나 공장에서 일하는 이가 많았으면 그랬을까.

강화엔 일제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방직산업이 번성했다. 1916년에 강화직물조합이 설치될 정도였다. 조양방직 설립 후 평화직물·심도직물·이화직물 등의 공장이 잇따라 들어섰다. 직물공업 활성화로 1950년대에 직물공장 수가 30여개에 이를 만큼 늘었다. 강화는 그 무렵 섬유산업 '메카'로 불린 대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렇게 발전을 거듭하던 강화 직물산업은 1970년대 중반 들어 사양길로 접어든다. 좁은 내수시장에서 지나치게 경쟁을 한 게 원인. 결국 대부분의 직물공장이 문을 닫았다. 조양방직은 훨씬 전 이미 폐쇄됐다. 복잡한 자본구조, 사업 초기 화재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58년 문을 닫았다. 이후 단무지·젓갈공장 등을 거치며 폐허로 변했다.

강화군은 1938년 가동 중단으로 수십년간 폐건물로 방치되던 직물공장과 한옥을 구매해 '소창 체험관'으로 운영중이기도 하다. 관광객 발길이 쇄도한다. 소창은 목화 솜으로만 만든 천연직물이다. 아기 기저귀 감과 이불 속 등으로 쓰여 요즘 주부들에게 인기다. 강화엔 1970년대까지 60여개 소창 제조 공장이 성업을 이뤘으나 지금은 10여개만 남아 명맥을 유지한다. 아무튼 이제 강화지역 관광지로 꼽히는 '카페 조양방직'과 '소창 체험관'을 찾아, 숨은 강화의 근대사를 돌아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