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40. 지평의병 이끈 호좌의진 선봉장 김백선(중)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40. 지평의병 이끈 호좌의진 선봉장 김백선(중)
  • 인천일보
  • 승인 2020.10.25 18:07
  • 수정 2020.11.08 18:18
  • 2020.10.26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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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이점 살려 서전에서 승리 이끌다

안승우, 화서학파 문인들과 거병 논의하다
원주 향한 지평 포군 급히 쫓아 안창서 합류
1896년 1월13일 손쉽게 관아 점령 후 퇴거

17일 대장 이필희 명의 격문 팔도에 돌리자
이튿날 봉기 급보받은 친일내각 관군 파견
지형 험한 단양행…장회협곡서 매복 공격

승전 후 처우 불만에 포수들 탈영 잇따르자
투쟁 멈추고 각지로 흩어져 병력 모집키로
▲ 단양 장회협곡, 충주호로 잠겨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 단양 장회협곡, 충주호로 잠겨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 이춘영 의병장 어록비. 경기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산 74번지.
▲ 이춘영 의병장 어록비. 경기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산 74번지.

◆ 처변삼사와 지평의병 봉기

일찍이 이항로(李恒老)-유중교(柳重敎)-유인석(柳麟錫)으로 이어진 화서학파(華西學派) 문인들은 유인석을 찾아가서 갑오·을미왜란에 이어 단발령까지 내린 마당에 처신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물었지만 딱 부러지는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문득 유인석이 내간상(內艱喪:양모상)을 당했는데 성복(成服)한 이튿날에 곧 묘지를 구하여 장사를 지내고는 여러 선비들을 모아 놓고 이른바 '처변삼사(處變三事)'를 내놓았다.

“큰 환난이 이 지경에 이르러 우리가 처신해야 할 길이 셋이 있다. 첫째는 거의소청(擧義掃淸)-의병을 일으켜 적을 소탕하는 것이요(의병봉기), 둘째는 거지수구(去之守舊)-돌아가 지키는 것이요(해외망명), 셋째는 자정치명(自靖致命)-스스로 몸을 깨끗이 함이니(자결) 각각 제 뜻대로 할 일이다.”

이에 이필희(李弼熙)는,

“오늘의 일은 싸우지 않으려면 죽는 길이요, 죽지 않으려면 싸우는 길이니, 그대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일어나 적을 토벌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라고 하자, 안승우(安承禹)는,

“지팡이 끝에 기를 달고 적을 꾸짖다가 죽는 것이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며, 그것은 또한 큰 의리를 후세에 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했고, 이범직(李範稷)은,

“스스로 깨끗이 하려 하여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니, 차라리 무슨 일을 하다가 사세에 쫓기면 죽을 뿐입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화서학파의 종장(宗匠)이었던 유인석이 국외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자는 견해를 내자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그냥 헤어졌었다.

그 후 안승우는 서상렬(徐相烈), 이필희, 이범직 등과 더불어 거병하기로 하고 거의 방법을 논의하러 갔던 차에 부친 안종응(安鍾應)의 부름을 받고 급히 지평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지평에 도착하자 김백선과 이춘영 등은 포군 400여명을 이끌고 인근 지역인 강원도 원주 안창역으로 향한 직후였다.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의 눈을 피하고, 안창역이 교통의 요지인데다가 이춘영 처가의 도움을 받아 의병 거의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급히 안창으로 가서 그들과 합류했다.

1896년 1월11일(음력 11월27일), 경기 지평의병이 원주에 모여 이튿날 창의 깃발을 들었고, 그 다음날 원주관아를 손쉽게 접수했다가 곧 물러났다.

▲ 안승우 의병장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복사본, 지평의병 지평리전투 기념관 소장).
▲ 안승우 의병장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복사본, 지평의병 지평리전투 기념관 소장).

◆ 충북 제천으로 나아가다

안승우가 선발대를 이끌고 제천으로 간 뒤 이춘영은 전 형조판서 김세기(金世基)와 원주군수 이병화(李秉和)를 찾으려고 했지만, 종적을 알 길이 없었다. 김 판서와 이 군수는 의병을 일으키기 직전에 그들과 접촉하여 거의 시 의병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함께 안창으로 가겠다는 약속을 받아 둔 터였다. 그런데 마음을 바꾸어 자리를 피하고 없었던 것이다.

이춘영은 시간을 지나치게 허비하다 보면, 오히려 관군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하여 제장들과 협의를 한 후 원주 사람 김사정(金思鼎)을 총독, 박운서(朴雲瑞)를 도령장에 임명하고, 원주의병들을 더 모집하여 따라오게 한 다음, 1월17일(음력 12월3일)에 충북 제천으로 들어갔다.

의진 수뇌부가 제천에서 의병 모집을 할 때 유인석이 의진으로 찾아왔다. 유인석을 보자 모두 반가워하며 예를 올린 다음 이춘영이 향후 선후책을 유인석에게 여쭈니,

“우리나라의 강한 포수는 서북지방에 있고, 적곡(積穀)과 인재는 모두 동남지방에 있으니 의병의 기지를 원주와 제천 사이에 건설한 후 오른쪽으로 서북의 군사를 모집하고, 왼쪽으로 동남의 인재를 모집하여 굳게 지켜 잃지 않으면, 팔로(八路)의 인심을 진작시킨 연후에 일이 제대로 될 것이네.”

유인석이 돌아간 후 의진에서는 8도 각 고을에 격문을 돌리기로 하고, 주용규(朱庸奎)가 지은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을 이순신 장군의 후손이자 의진의 대장으로 추대된 이필희 명의로 각지로 보냈다.

'격고팔도열읍'

“…말의 피를 마시며 동맹을 하노니 성패이둔(成敗利鈍)에 있어서는 내가 역도(逆睹)할 바가 못 된다. 생이냐, 의냐, 양자택일의 경우에 생을 버리고 의를 택함으로써 경중대소(輕重大小)가 이에 분명하게 갈라진다. 대중의 마음이 다 따르니 어찌 백령(百靈)의 도움이 없겠으며, 국운이 다시 열리니 사해(四海)가 길이 맑음을 볼 것이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을 의심치 말며 의로운 군사가 불의를 무찌르는 것을 다른 데서 구하랴.

이에 감히 먼저 일으키는 처지를 위하여 이로써 사람에게 포고하노니 위로는 공경대부로부터 아래로는 궁사서민에 이르기까지 누가 애통절박한 마음이 없겠는가? 진실로 위급존망의 때라. 각자가 다 거적자리를 깔고 방패를 베개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아무리 어렵고 위태한 곳이라도 뛰어들어 기어코 망해 가는 나라와 천하의 도의를 다시 만들어 천일(天日)이 다시 밝도록 하라.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1권. 199~200쪽)

1월18일, 의병봉기의 급보를 받은 내부대신 유길준은 국왕께 주청하여 내부협판 유세남(劉世南)으로 하여금 군사를 끌고 가서 선유하게 했다. 이어 '창의의 이름으로 일을 도모하는 자는 쳐부순다'고 엄포하면서 많은 군대가 달려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 원주관찰부 감영. 강원 원주시 원일로 85(일산동 54-1).
▲ 원주관찰부 감영. 강원 원주시 원일로 85(일산동 54-1).

◆ 단양 장회협곡에서 관군과 싸워 승리하다

의병들의 의기는 충천하였지만 무기가 없고, 훈련이 없던 의진으로서는 당장 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의진에서는 대책을 강구한 결과, 우선 지리가 험요(險要)한 곳을 차지하여 싸우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은 단양이 제천에 비하여 작전상 유리하다는 데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의진에서는 안승우로 하여금 제천을 지키게 하고, 단양으로 출발하였다.

단양 군민들은 의병들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횃불을 들고 마중을 나왔다. 의진은 어렵지 않게 단양 관아로 들어가서 군수 권숙(權潚)을 만나려고 했지만, 군수는 의진의 입성을 거절하며 성문을 열어주지 않자 의병들은 성벽을 넘고 들어가서 권숙을 옥에 가두었다.

1월22일, 관군과 일본군이 단양읍을 향하여 쳐들어오는데, 여기에는 도망갔던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蓍) 일행도 함께 온다는 소문을 듣고 의진의 선봉장 김백선이 의병을 이끌고 나섰다. 그가 이끄는 의병들은 날랜 산짐승을 잡으며 생업을 하던 포수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대부분 엽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갑오농민혁명 때 실전에 참가한 포수들로서 두려울 것이 없는 막강한 부대였다.

정오 무렵 관군 100여명과 일본군 10여명으로 구성된 연합 부대가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장회협곡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곳은 골짜기를 따라 남한강이 흐르고 있기에 좌우 협곡에 매복하였던 군사들이 일제히 공격하였는데, 맹렬한 총소리가 단양 고을을 진동하며 격전이 몇 시간 계속되었다.

해가 서산마루에 걸릴 무렵 관군과 일본군은 시신을 버리고 부상자들을 부축한 채 달아나니 이것이 지평의병으로 구성된 제천의진의 제1차 승전이었다.

진중에서는 소를 잡고 술을 내어 의병들을 호군했다. 그런데, 실제로 전투에 참가한 것은 김백선이 이끈 포수부대였는데, 술과 고기는 유생 쪽에서 더 포식하는 것을 보고 포수들은 기분이 상했다.

제천의진은 하루를 쉬고 이튿날 제천을 향해서 진군을 시작했다. 의진 지도부는 영월 쪽을 거쳐서 제천으로 향한다고 했다. 단양으로부터 들어올 때 무리하게 행군을 한 탓에 유생 출신들은 금방 지쳤다. 포수들이 천천히 걷는데도 잘 따라오지 못했다. 의진 수뇌부는 박달재에서 하루를 쉬기로 했다.

그런데, 밤사이 큰 변화가 생겼다. 아침이 되자 당초 500여명이던 의병이 겨우 200명을 넘길 정도였다. 게다가 그들 중 제천 출신 20여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김백선을 따르던 포수도 절반만 남은 상태였다. 이에 의진 수뇌부가 황급히 회의를 열고 이필희 대장이 중대 발표를 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소생은 능력이 부족하고 덕이 엷어 의진을 맡을 수가 없소이다. 본래 군사들은 지평 포군들이니 처음대로 중군장이 맡았으면 하오이다.”

중군장 이춘영과 신지수(申芝秀)는 극구 말렸지만, 결국 이필희는 이춘영에게 대장직을 넘기고 20여명과 함께 제천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춘영을 비롯한 의진 수뇌부는 비록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쳤지만, 지금의 사기와 의병으로는 의병투쟁을 벌이기가 어려우므로 당분간 의병투쟁을 중지하고 의병 모집을 위해 각지로 나서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이춘영과 김백선은 원주와 지평 방면으로, 서상렬과 원용정(元容正)은 안동 쪽으로, 이범직은 호서지방으로 나아가 의병을 모집하기로 하였고, 제천에 머무르던 안승우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의진을 대표하는 대장이 명망가가 되어야겠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인근에 살던 전 판서 심상훈(沈相薰)을 찾아가서 의진을 맡아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늙고 기력이 없어 대임을 맡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는 영월 주천으로 가서 100여명의 의병을 모아 유인석을 찾아갔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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