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로만 남은 유산…기억할 역사, 잊은 건가 지운 건가

개항장 중심부 들어선 누들플랫폼…과거 일제강점기 원형 간직한 단독주택 있던 곳
2003년 인천시 보전 대상 건축물 목록에 이름 올렸지만 주차장 조성 위해 허물어
시·군구 정리한 근대문화유산 실체 없는 것 허다…본보 조사결과 46개 흔적도 없어
▲ 인천 근대문화유산 210개 중 46개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왼쪽 사진은 19일 막바지 공사가 진행중인 인천 중구 누들플랫폼이 위치한 개항장 거리 전경. 근대건축물 철거 후 공영주차장으로 사용되던 부지에 들어선 누들플랫폼은 전시체험공간으로 개관할 예정이다. 오른쪽 사진은 근대건축물 철거 이전 모습. /이상훈 기자·사진제공=문화재청 문화재공간정보서비스 photohecho@incheonilbo.com

남기느냐, 없애느냐. 그것만이 문제였다. 근대문화유산은 가혹한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채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갈림길이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건축물 상당수에는 '식민 잔재'라는 주홍글씨가 덧씌워졌다. 낡은 오늘과 어두운 과거는 근대문화유산을 이중의 굴레에 가둬 놓았다. 내년이면 근대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도입된 등록문화재 제도가 시행 20년을 맞는다. 근대건축물 수난사는 반복되고 있다. 인천일보는 10회에 걸쳐 인천시민 삶이 녹아 있는, 역사를 견뎌낸 건축물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역사의 흔적이 사라지면 이 땅의 삶도 묻힌다. 과거를 지우고 잊어버리면 불편한 역사는 되풀이될 수도 있다. 210개 인천 근대문화유산을 되짚어보는 과정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기억이자, 살아가는 것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인천부 청사'였던 중구청과 맞닿아 있는 관동2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의 관광특구 활성화 공모에서 '역사문화순례길 조성사업'으로 선정된 개항장 중심부 골목인 이곳에선 지난 10일 '누들플랫폼'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누들플랫폼은 중구가 998㎡ 터에 93억원을 들여 지상 3층으로 신축했다. 짜장면·쫄면 등 인천에서 처음 선보였던 면(麵_누들)을 주제로 한 전시·체험 공간이다.

누들플랫폼이 착공된 2018년 7월 이전에는 공영주차장 자리였다. 시간을 더 거슬러 중구가 주차장을 조성하려고 이 부지를 매입했던 2009년까지만 해도 개항장에 어울리는 건축물들이 남아 있었다. 1941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 2층 벽돌 건물과 일제강점기 원형을 간직했던 단독주택이다. 맞은편에서 1990년대부터 세탁소를 운영한 박노익(68)씨는 이들 건물을 떠올렸다. 그는 “구에서 '주차장 만든다'며 매입한다는데 주인이라고 별 수 있겠나. 건물 팔면서 이사 가버렸다”며 “예전에 공무원들이 근대건축물 설명한다면서 돌아다니긴 했는데, 그것도 20년 가까이 됐다”고 말했다.

철거된 건축물 2동과 세탁소는 비슷한 궤적을 지나왔다. 이들 모두 2003년 인천시가 고시한 '개항기 근대건축물 밀집지역 지구단위구역'을 통해 '보전 대상 건축물' 53동에 올랐다. 1년 뒤 시의 '근대문화유산 목록화 조사보고서'에도 기록됐다. 보전 대상이자 근대문화유산이었는데도 공영주차장에 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건물들은 황당하게도 수년 뒤에 문서상으로 부활한다. 2016년 시가 군·구 실태조사로 정리한 '인천근대문화유산' 210개 목록에는 관동2가 철거 건물 2동이 들어 있다. '현재 새마을운동 중앙협의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음', '원형이 잘 보전돼 있음'이라는 설명도 덧붙여졌다. 지자체에 의해 허물어진 지 7년 지난 시점에서 지자체 실태조사를 통해 실체도 없는 근대문화유산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인천일보가 지난 8월 중순부터 2개월에 걸쳐 근대문화유산 210개를 전수조사한 결과, 46개(21.9%)가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건물이 사라진 자리에는 주차장이 들어섰고, 임대 수익을 노린 다세대주택이 솟았다. 개발 예정지로 분류돼 공터로 변했거나, 시한부 선고를 받은 건축물도 있다. 관동2가 사례처럼 실태조사가 벌어지기 수년 전에 허물어졌는데도, 근대문화유산에 포함된 건물도 상당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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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근대건축물을 전면 철거하는 방식의 도시재생은 장소성을 훼손하고, 역사를 단절시킨다”며 “인천 정체성을 이어가려면 근대건축물의 가치를 인식하고, 체계적인 보존·활용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순민·김신영·이창욱 기자 sm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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