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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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천 중구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앞에서 조그만 행사가 열렸다. 인현동 화재참사 조형물인 '기억의 싹' 제막식이었다. 세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행사였지만, 21년 전 일어난 사고를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고 한다. 조형물 명칭을 보니 화재 당시가 떠올랐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싹이었다.

1999년 10월30일 저녁 7시쯤 인천시 중구 인현동에 있는 4층 상가건물에서 큰불이 났다. 내부수리 중이던 지하 노래방에서 발화된 것이다. 이 화재로 건물 2층 '라이브II' 호프집에 있던 청소년 57명이 숨지고 71명이 화상을 입었다. 대부분 가을축제를 끝내고 뒤풀이를 하던 남녀 고등학생이었다.

취재하던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은 것은 당혹감이었다. “학생들이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갔다가 변을 당했으니 동정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편협하고 왜곡된 시각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야만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그 사고로 딸을 잃은 인천시 간부는 이러한 측면이 마음에 걸렸는지 사표를 냈다. 시장이 직접 만류해 사직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사람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피해가 컸던 것은 불이 난 뒤 학생들이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갈까봐 호프집 주인이 하나뿐인 출입구를 잠갔기 때문이다. 탈출하지 못한 학생들은 유독가스에 질식사했다. 정말 어이없이 죽음이었다.

호프집은 상습적으로 미성년자들에게 술을 팔아 자주 신고를 당했으나 든든한 백이 있었다. “경찰 간부가 호프집 주인 집에 산다”는 제보를 받고 늦은 밤 해당 경찰관에게 전화했더니 그는 오히려 “거주의 자유도 없느냐”며 큰소리쳤다. 다음날 신문이 나오기가 무섭게 그는 오전 6시쯤 경찰에 연행된 뒤 구속됐다. 전세금을 내지 않고 호프집 주인 집에 살았다는 이유로 뇌물수수죄가 적용됐다. 어찌보면 희생양이 된 측면도 있고,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친 것 같아 때때로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도주했다가 10여일 뒤 체포된 호프집 주인은 경찰서 마당에서 기자들에게 공개됐는데, 뉘우치는 기색은 없이 중얼거려 기자들이 큰 소리로 말할 것을 요구하자 머리를 삐딱하게 세운 뒤 “밥을 못 먹어서 그렇다”며 도발적으로 말했다. 그는 화재로 두 번 망한 사람이었다. 전에도 학생들을 대상으로 불법영업을 하다 불이 나 재산을 탕진한 적이 있는데, 다시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돈을 쉽게 버는 방법을 택한 것이 학생들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다.

요즘도 그때 일이 종종 생각나는 것은 기자활동을 하면서 겪은 가장 황당하고 안타까운 사고로 기억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