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주용 인하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최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다. 개천절과 한글날 광화문에 세워진 차벽과 검문소 때문이다. 집회를 기획한 사람들은 정부가 부당하게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집회를 막는 정부 당국은 코로나19의 확산을 예방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감염병의 위협이 현저한 현재 상황을 고려하면 어느 한쪽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긴 어렵다. 표현의 자유가 인간의 기본권으로 받아들여진 역사는 오래됐지만 무조건적인 권리로 인정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를 기본권 중에서도 가장 우월한 것으로 인정하는 미국에서도 그렇다. 20세기 초부터 미국 법원은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는 판례를 정립해왔다. 미국 법원의 입장은 가장 현명한 진리 추구 방법은 시장의 경쟁을 통해서 선택되는 사상의 힘에 맡기는 것이며, 개인의 의사표현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아닌 이상 정부가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과격하게 보이는 행위에 대해서도 표현의 자유 보호라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1984년 미국 공산혁명당 활동가인 그레고리 존슨이라는 청년이 시위 도중 성조기를 불태웠다. 당시 댈러스에서는 대선 후보 지명을 위한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존슨은 댈러스 시청 앞에서 성조기에 기름을 붓고 불태우며 레이건의 재선을 반대하는 구호를 외쳤다. 이 일로 그는 텍사스주법에 따라 징역 1년과 20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자, 연방대법원에 상고하게 된다.

이 사건은 미국내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처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는 존중하나 국가 상징물인 성조기를 훼손한 것은 미국 정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주장했다. 처벌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조기의 상징성을 인정하니 태우는 것이며, 미국의 가치를 실제로 위협하지 않는 상징적 행위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당시 여론은 국가가 자신의 상징인 성조기를 보호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쪽이었지만 연방대법원은 존슨의 손을 들어주었다. “성조기 훼손은 정치적 견해를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제1조의 보호대상”이라고 본 것이다. 이 판결로 인해 당시 48개 주에서 시행되고 있던 국기모독죄가 무효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무제한적으로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사건을 보자. 1917년 8월 필라델피아 사회주의 정당의 집행위원인 찰스 쉔크는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정부의 모병에 응하지 말 것을 호소하는 팜플렛을 배포했다. 당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독일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일로 그는 방첩법 위반죄로 기소되었고 이 사건은 연방대법원에까지 상고되었다. 그는 “사회주의자의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일상적인 시기에는 그러한 표현이 보호될 수 있으나, (전시인) 현재는 그런 시기가 아니다. 또한, 모병을 방해하는 팜플렛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야기하기에 충분한 가능성과 정도를 가진 표현으로 정부가 해당 표현에 대한 규제 권리를 갖는다”고 판시하였다. 즉 일상적인 시기라면 사회주의자의 표현도 헌법적 보호를 받겠지만, 이 사건이 발생한 당시에는 전쟁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어서 해당 표현이 가진 위험이 크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 법원도 특수한 시기에 특정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음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법원이 막연히 '위험한 시기'와 '위험한 표현'이라는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미국 법원은 여러 판례를 통해 1900년대 초반 수립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을 보다 정교화했는데, 현재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경우 해당 표현 행위가 명백하고, 즉각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정부가 입증해야만 한다는 엄격한 입증책임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 쉽진 않다.

미국의 이야기지만 최근 우리 정부와 시위대 간의 기본권 논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감염병의 위협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란 것은 사실이지만 집회를 완전히 제한해야 할만큼 위험한 상황인지를 설명하는 노력도 중요한 정부의 책무이다. 소통을 표방하는 정부가 아닌가. 차벽으로 상징되는 강력한 공권력이 국민의 눈에, 외국인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서도 한번쯤 고민해 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