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개항·청일전쟁 뒤 일본인 늘어
일본 은근짜들 퍼져있다 부도유곽 발족
인근 화개동 터따라 조선인 유곽도 생겨
일어 발간 조선신문에 광고도 버젓이
여성 인권 존엄성 전혀 찾아볼 수 없어
우리나라에도 고대로부터 매음이나 색주가, 삼패기생(三牌妓生) 등 윤락에 관련한 기록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개항 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벌인 행태와는 정말이지 분수(分數)와 정도(程度)의 차이가 있었다. 시내 복판에 버젓이 유곽 업소 간판을 세우는 무치(無恥)에다 조합을 결성해 유곽이 관광업의 한 요소이기나 한 것처럼 미화(美化)해 내세우는 후안(厚顔)이었으니….
제물포 주민들은 개항과 더불어 밀려드는 이방인들과 낯선 풍물과 제도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면서도, 유곽의 등장에 대해서만은 질색하며 혀를 찼을 것이다.
전회(前回) '권번'을 설명하는 중에 일인들의 성정과 습벽에 대해 짧게 언급한 바 있지만, 신태범 박사는 한·중·일 3국 중에 성(性)에 관한 한 일인들이 가장 많은 일탈과 분쟁을 일으킨다고 지적하고 있다. 중국인은 주로 도박 문제에 연루되는데, 한국인만은 어느 쪽에든 비교적 담백하다는 것이다. 신 박사는 다만 이것이 1930~40년 무렵의 통계 자료를 견문(見聞)한 것이라고 밝힌다.
일본인들의 성에 대한 특징은 1946년에 발간된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의 『국화와 칼』에서도 읽을 수 있다. “남자는 결혼 후 그야말로 공공연히 밖에서 성적 쾌락에 빠지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조금도 아내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결혼 생활의 안정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인들의 사고방식이 이러했고, 시대가 19세기 말, 20세기 초였다면 저들 역사에 오래 존속해온 유곽을 인천에 세우는 것쯤은 전혀 주저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인천의 유곽, 즉 부도유곽(敷島遊廓)의 내력에 대해서는 역시 그 시대의 증언서,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 기록이 확연하다.
1883년에 인천이 개항된 후 청일전쟁에 이르는 10년간에 일본인의 수는 4000이 넘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늘 가는 데 실이 따르듯이 몸을 파는 일녀(日女)가 모여들었다, 신생동(新生洞)에서 신흥동(新興洞)으로 접어드는 인천여상(仁川女商) 부근과 답동성당(畓洞聖堂) 언덕 아래 그리고 전동(錢洞) 인일여고(仁一女高) 아랫길 주변에 사창(私娼)굴이 생겼었다고 한다. 청일전쟁을 전후해서 내왕이 빈번해진 군인을 보호하기 위해 인천여상 주변 일대를 특정지역으로 책정했다. 얼마 안 되어 이곳이 발전하는 상가와 인접하게 되자 격리하지 않을 수 없어 일본 요정의 공동투자로 선화동(仙花洞) 한 구석에 부도루(敷島樓)라는 일본식 유곽(遊廓)을 개설하고 이 부근으로 특정지역을 옮겼다. 그리고 동네를 부도정(敷島町)이라고 명명했다. 1902년에 영사관의 허가를 얻어 부도유곽이 정식으로 발족하게 된 것이다.
이 글을 통해 개항에서부터 1894년 청일전쟁에 이르는 10년 남짓한 동안 스며들 듯 들어온 일녀(日女) 은근짜들이 인천 곳곳에 퍼져 있다가 선화동 부도루 부근 특정구역에 모인 후, 1902년에 정식 허가를 받은 유곽으로 발족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인 유곽이 생기고 동네 명칭까지 부도정으로 바뀌면서, 필경 그 풍조에 물든 탓에 인근 화개동(花開洞)을 터로 해서 조선인 유곽까지 생겨난다. 1924년 4월 10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그 조선인 유곽의 일면이 드러난다.
인천 부도정 유곽 3월중 성적은 등루자(登樓者) 조선인 9백여 명 내지인 1천여 명, 유흥비 조선인 3천여 원(圓), 내지인 1만6천여 원인바 차(此)를 전 인천 인구의 비례, 조선인은 3, 내지인 1을 거(擧)하여 대조하면 내지인의 풍류랑(風流郞)의 비교 다수(多數)임을 규찰(窺察)하겠는데 현재 청루(靑樓)는 조선인 23헌(軒) 창기 93인, 내지인 14헌 창기 180인이라더라.
일본인들의 풍조를 닮아, 가리지 않고 이 같은 내용도 기사화 하고 있다. 참고로 당시 인천 인구는 조선인 2만9천여 명, 일본인 1만1천여 명이었음을 밝힌다. 따라서 이 기사 내용을 부연하자면, 3월중에 조선인은 대략 3명 중 1명이, 일본인은 1명 중 1명이 등루(登樓)했다는 뜻이다. 등루란 기루(妓樓)에 하룻밤 묵는 것을 말한다.
그밖에는 러일전쟁 후, 만석동 해안을 매립한 일본인 도전(稻田)이라는 자가 유원지 요정 팔경원(八景園)을 열고, 인근 괭이부리[猫島]에 새로운 유곽을 차리기도 하나 기존의 부도유곽에 미치지는 못했는지 오래지 않아 영업 부진으로 문을 닫는다. 유곽 종사(從事)를 어엿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저들답게 1920년대에 들어 자주 일어(日語)로 발간되던 조선신문에 광고를 싣는다. 1920년대에는 인천부도유곽조합(仁川敷島遊廓組合) 명의의 광고였다가, 1930년대에 들어서는 11개의 기루가 광고란에 나란히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인 유곽 광고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유곽의 옥호(屋號)를 신문에 올리는 것도 그렇거니와, 이따금 실리는 유곽 기사는 정말이지 고개를 돌리게 한다. 일례로 1936년 7월 4일자 조선신문 기사를 소개한다.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 함태영(咸苔英) 과장이 원문을 번역했다.
반도 제일의 무역항을 자랑하는 인천은 무역의 진전, 관광시설의 충실, 공업의 발전으로 바다와 육지를 통해 외래객의 홍수 상태이며 좋은 경기를 보이고 있다. 항구에서 먹고사는 인천에서 붕정만리의 날개를 편히 쉬며 거친 바람과 파도에 지친 해원(海員)들의 유일한 위안 장소인 부도유곽의 개선 문제에 관해 나와다(_田) 조합장은 여러 계획을 추진 중인데 그 내용은 싸고, 기분 좋게 해원들의 위안 장소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모양이다. 실내의 미관, 침구류의 청결, 주효품의 염가 공급, 미인의 초빙, 포기(抱妓)의 서비스 등 시대에 맞춰 손님 기분에 딱 맞도록 업무의 쇄신을 꾀하여 교토의 시마바라나 기온 유곽과 같이 관광 인천의 명소로서 내용과 외관 모두 충실토록 하겠다고 한다.
여성의 인권이나 존엄성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오직 상품일 뿐이다. 그러면서 사회에 대해서는 '관광 인천의 역군(役軍)'이라는 투로 자기들의 '욕망 영업(?)'을 자부심 가득한 것으로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빗나간 개항이 제물포에 옮겨준 것은 유곽이라는 부끄러운 음지(陰地) 세계와 그들 일인들의 무분별한 성 풍조였다. 그리고 그 잔재는 어둡고, 한 서린 일화들과 함께 근래에 이르기까지 학익동, 숭의동 등지에 남아 있었다.
/김윤식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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