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왜 그를 '무임 문관' 출신으로 기록했나
해산군인 출신 3000명 포함 1만 군세 이끌고
서울진공 노렸으나 부친상 당해 말 머리 돌려
작전 무산 이후 각 의진들 연고지서 의병투쟁
진술조서엔 '관리가 된 적 없음' 기재했으나
종2품관 7년간 역임…광무황제 밀지 받기도
황제 지지·고관 참여 숨겨 '폭도'로 폄훼 기도

 

  

▲ 13도창의대진 의병대장 이인영 기념비. 경기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37-6(생가).
▲ 13도창의대진 의병대장 이인영 기념비. 경기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37-6(생가).

 

◆ 서울진공작전의 규모

중남 이인영 의병장이 일제를 물리치기 위해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자고 전국 각지에 호소문을 낸 것이 광무 11년(1907) 10월31일(음력 9월25일)이었다.

이에 문태서·민긍호·박정빈·신돌석·이강년·허위 등 각지에서 활약하던 의병장들이 의진을 이끌고 참여하게 되었다. 이른바 13도창의대진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문 : 당시 모였던 각 진의 인원은 어느 정도였는가?

답 : 상세한 것은 모르지만 약 1만 명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각 도 전부 온 것은 아니라 일부를 인솔하고 모인 것입니다.  강원도가 대략 8,000명 정도, 평안도 80명, 함경도 70명 정도였습니다.

문 : 당시 너의 부하가 가장 많아서 네가 대장에 추천된 것인가?

답 : 부하는 다수가 아닙니다. 저보다 다수의 부하가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을미년에 다른 사람에 비해 공평하게 행동을 취하였기 때문에 이름이 알려지고, 세상 사람의 신뢰를 받은 적도 있어서 모두로부터 추천받은 것입니다.

문 : 너보다 다수의 부하를 인솔한 자는 누구인가?

답 : 민긍호입니다.

문 : 민은 너의 부하가 아닌가?

답 : 원래는 부하가 아닙니다. 양주에 집합하였으므로 대장은 두 사람이었습니다. 민은 2,000명, 저는 1,000명 정도였습니다. 기타 각 도당이 따라와서 약 8,000 정도 되었습니다.

문 : 진위대의 병사가 서양식 총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는데, 그 병력은 몇 명 정도였는가?

답 : 문경에 이은찬과 이구채가 인솔해 온 것이 군대 80명 정도이며, 강원도 민긍호 휘하 약 800명, 강화도와 청주의 해산병, 기타 경성 각지의 해산병을 통해 양주에 집합하였을 때는 약 3,000명 정도였습니다. 이는 당시의 해산병과 그 이전에 군대였던 자를 합친 수입니다.  제가 처음에 관동창의대장으로 섰을 때는 해산병은 약 200명이었습니다.” ('이인영진술조서', <통감부문서>, 1909년 6월 30일)

 

13도창의대진의 규모는 약 1만명이고, 그중 약 3000명이 해산군인이었기에 상당한 전투력을 갖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13도창의대진의 총대장으로 추대된 것은 전직 고관 출신인데다가 전기의병 때 공평한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이 알려진 것이라고 했지만, 광무황제로부터 거의하라는 밀지를 받은 것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진술조서에서 광무황제로부터 밀지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했지만, 허위 의병장의 진술에는 그가 밀지를 받았다고 하였다.

 

▲ 이인영 의병장 생가. 경기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37-6(생가).
▲ 이인영 의병장 생가. 경기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37-6(생가).

 

◆ 서울진공작전, 중단 이후의 모습

기려자(騎驢子) 송상도(宋相燾)는 이강년 의병장이 북상 이전과 북상하여 서울진공 때의 상황, 그리고 13도 창의대진의 격전을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1907년) 8월 영춘으로 들어가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격문을 보내고, 영월로 들어가서 왜의 병참을 쳤다. 9월 선유위원 홍우석(홍우철의 오기)이 수비대 병사 100여 명을 이끌고 오므로 이강년은 우선봉 백남규(白南奎)로 하여금 사리치(寺里峙:싸리재)에 매복하게 하여 대파하고 단양에 이르러 또 적과 대전을 치렀다. 이리하여 경기·호남·영남의 적들이 몰려들어 수천의 의병들이 13일 동안 싸우는 바람에 전력이 고갈되었다.” (필자 역) (송상도, '기려수필', <한국사료총서> 제2집. 123쪽)

 

이처럼 각지에서 서울 부근으로 집결하면서 13도창의대진에 참여한 전국 의병은 일본군과 싸우면서 북진하여 서울진공작전을 벌여 통감부를 쳐부수고 국권회복(國權恢復)을 도모하려 했으나 당시로서는 의진 상호 간의 신속하고도 원활한 공조체제를 할 수 없는 형편인데다가 대규모 일본 군경들이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을 차단하는 바람에 각지에서 모여든 의병들은 서울에서 꽤 먼 곳에 진을 칠 수밖에 없었고,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백, 수천명의 의진이 한겨울에 전투를 벌였다는 점에서 큰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더구나 1908년 1월28일(음력 12월25일) 중남이 부친 사망 부고를 받고는 후사를 군사장에게 부탁하고, 아울러 각 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 활동을 중지하라고 전한 후 문경으로 돌아갔으니, 서울진공작전은 중단되고 말았다.

13도창의대진의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후 이강년, 문태수, 신돌석 등의 의병장은 의진을 이끌고 종전의 연고지로 돌아가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막강한 관동의진을 이끌었던 민긍호 의병장이 선유사 홍우철과 선유대원 박선빈의 계략에 말려 일본 군경의 기습을 받고 그 해 2월29일 영월군 수주면 강림(講林:현 횡성군 강림면 강림리)에서 순국하니 관동지방의 의병들은 사기가 크게 꺾이게 되었다.

허위는 임진강 유역의 의병부대를 지휘하면서, 군율을 정하고, 군표(軍票)를 발행하면서 군사를 훈련하고, 무기를 제조하게 하였으며, 5월에는 광무황제의 복위, 외교권 회수, 통감부 철거 등의 30개조에 달하는 민족적 요구를 통감부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은찬은 원수부 의진을 재편하고 의병장에 올라 포천·양주 지역과 임진강 유역에서 김수민·김교승·김준식·맹군집·심노술·연기우·오수영·윤인순·정용대·지홍윤 등이 이끄는 10여 개의 의진 2500여 명의 의병과 다양한 형태로 연합하여 의병투쟁을 펼쳤다. 특히 황해도 평산·해주 등지에서 맹활약하던 이진룡·한정만 등의 의진과 호응하면서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양주·포천·연천·삭녕·금천·백천·연안을 연결하는 지역과 서해 도서까지 일본 군경을 기습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 1909년 6월7일 이인영 의병장을 체포했다는 한국주차헌병대장 통보서(<폭도에 관한 편책>. 1909. 6. 8.).
▲ 1909년 6월7일 이인영 의병장을 체포했다는 한국주차헌병대장 통보서(<폭도에 관한 편책>. 1909. 6. 8.).

 

◆ 이인영 의병장의 진면목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중남은 유학자 출신이라고 알려졌는데, 어떻게 전국 48진 13도창의대진소 총대장이 될 수 있었을까? 유학자로서 중망이 있어 종2품 의정부 참찬을 지낸 왕산 허위가 13도창의대진소 군사장이 되고, 불과 수개월 전에 3도 16군의 도체찰사 칙령을 받았던 선전관 출신 운강 이강년 의병장도 있었고, 원주진위대 정교 출신 민긍호 의병장은 2000여 명의 의진을 이끌고 있었는데….

이것은 판결문에 중남의 신분이 단순히 '문반(文班)'이라고 기재된 것과 '이인영진술조서'에서 “양반(문반)이며 유생임. 일찍이 대성전 재임(大成殿齋任)으로 무임 문관(無任文官)이 된 적이 있지만, 그 외에는 관리가 된 적이 없음.”이라는 일제의 일부 기록만을 보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남은 후기의병을 일으킬 때 한자명을 바꿔 신분을 감춘 것은 물론, 당시 생존한 유인석, 이범윤, 이진룡, 정용대, 차도선, 홍범도 등의 행적에 대해서는 철저히 감추고, 순국한 민긍호, 신돌석, 이강년, 허위 등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히 진술하였다. 특히 실제 진동창의대장은 권중희(權重熙, 본명 권중설權重卨)였는데, 이태영(李泰榮)이라 하였고, 지방안무(地方按撫)는 김수민(金秀敏)이었는데, 김준수(金俊洙)라고 하였다. 당시 이들은 의병장으로 활동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수민 의병장이 피체된 후 경기도 경찰부장이 내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수민(金守民:秀敏, 守敏이라고도 칭한다), 43세, 양반, 무직, 전 주사이었던 관리 경력이 있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능했다.

(중략)

김(金)이 일어난 당시는 30명의 부하를 갖고 재작년 말에 이르러 약 300명이 되어 이어 일본병에게 토벌되었으므로 흩어져 겨우 부하 1명만이 남은 일이 있었다. 작년 봄에 다시 5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기에 이르렀으나 질병으로 군기(軍氣)가 부진하였고 그리고 그가 가장 존숭(尊崇)한 것은 이인영으로 그는 이(李)로부터 '지방안무'라는 칭호를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9권. 649~650쪽)

 

왕산 허위는 을미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기찬 의진의 참모장 출신으로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에 의해 1898년 벼슬길에 올라 9품 영희전 참봉, 이듬해 8품 소경원 봉사, 성균관 박사, 1904년 주차일본공사 6품 수행원으로 다녀온 후 특진하여 정3품 중추원 의관, 평리원 판사, 평리원 재판장사무서리 1주일 만에 종2품 의정부 참찬에 올랐으니, 4개월 만에 6품관에서 참판급에 오르는 초고속으로 승진하고, 이듬해에 비서원 승에 제수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면직된 후 의병투쟁을 모색했던 터였다.

왕산이 벼슬길에 들어설 때 중남은 이미 종2품관이었고, 왕산이 정3품으로 특진할 무렵 중남은 종2품관을 7년간 두루 거치다가 벼슬길에서 물러난 시기였다. 그가 군사장을 맡은 것은 중남이 1900년 평리원 수반판사를 역임했기에 왕산은 그의 후임이기도 하였다.

중남은 피체되어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공소조차 하지 않았다. 판결문과 교수형 재가 기록에는 이인영(李麟榮)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는 물론, 일본의 비밀기록에도 대부분 이인영(李寅榮)으로 나온다. 의병을 일으킬 때 초명 이인영(李寅榮)이 아닌 이인영(李麟榮)이란 이름으로 바꾸었고, 심지어 선친의 장례를 치른 후에는 이시영(李時榮)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문 : 너는 근래 이인영(李麟榮) 외에 별명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나?

답 : 이준영(李竣榮)이라고도 합니다.

문 : 재작년 폭도를 일으키고부터 이준영(李竣榮)이라고 일컬은 적이 있는가?

답 : 이인영(李麟榮)이라고만 부르고 있었습니다.

문 : 너는 을미·병신년의 폭동에도 일부의 장(將)이 되었고 이번에는 스스로 관동대장이라 칭하여 국민에게 이름이 알려질 정도인데, 이번에 황간군 자택에서 체포될 때 계속 이름을 속이고 실제를 말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당시 너의 태도는 명성이 있는 너에게는 어울리지 않지 않는가? 혹시 달리 이유가 있었는가?

답 : 창의(倡義) 중에는 이인영(李麟榮)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의병을 그만두고 단지 아버지의 상을 입고 칩거하는 데 이인영(李麟榮)이라 말하는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혼에 대해서도 이를 피하고 일반적으로 이시영(李時榮)이라 칭하고 있었습니다.” ('이인영진술조서', <통감부문서>, 1909년 6월 30일)

 

천안헌병분대 대전분견소장 중위 구라토미(倉富和三郞)가 3차례 신문하는 과정에 나타난 내용을 살펴보면, 이인영이 고관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거나 고의적으로 회피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육남의병장(六南義兵將·삼남이 둘로 나눠진 상황이라 육남이라 칭함)' 유종환(兪宗煥)이 소지한 밀칙(密勅)을 '의조 밀칙(擬造密勅)'이라 하여 황제가 비밀리 의병을 지지한다는 사실과 고관 출신과 명망가의 의병 참여 사실을 숨기고, 의병을 단순한 '폭도'의 무리로 폄훼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