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너머의 영화들] 19.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 ‘오이디푸스 왕’
[시간 너머의 영화들] 19.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 ‘오이디푸스 왕’
  • 인천일보
  • 승인 2020.09.28 18:00
  • 수정 2020.09.28 18:00
  • 2020.09.29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극의 도시'를 맴도는 눈먼 방랑자의 피리소리
▲ 영화 '오이디푸스 왕' 중 고대 그리스 도시 톄베의 왕 오이디푸스의 모습.

 

“네가 나의 자리를 차지하러 왔으니, 내 모든 것을 빼앗고, 나를 '무(無)'로 되돌리리.”

파시스트 군대의 장교복을 입은 아버지가 유모차에 있는 아들을 매섭게 노려보며 마음속으로 말한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아내의 사랑을 빼앗는 것부터 시작하여 자신이 소유한 부, 권력 등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될까 봐 두렵고 불안하다. 그의 불안은 악몽이 되어 오이디푸스 신화를 재연한다.

1922년 이탈리아 귀족 출신의 파시스트 장교 아버지와 농민의 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은 대지의 품처럼 따뜻한 어머니와는 달리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고통스러운 유년시절을 보낸다. 이런 유년시절의 고통은 그리스 신화 속 비극적인 인물인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 이야기에 투영되어 영화 '오이디푸스 왕'(1967)을 탄생시킨다. 감독은 원시적이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재구성하여 역사와 신화, 현대와 고대를 넘나들며 파시스트적인 아버지 세대에 대한 정신분석을 시도한다.

 

신화의 재해석을 통해 드러낸 파시즘의 근원과 비극

풀벌레 소리와 함께 세상에 태어난 아기는 엄마 품에 안겨 들판으로 나온다. 아기는 들판에 누워 꽃, 나무, 새 등 대자연과 어울리며 즐겁게 노니는 어머니의 세계, 즉 평화로운 여성들의 세계를 바라본다. 이어 군대행진곡과 함께 아기 앞에 나타난 아버지의 세계는 위압적이고 폭력적인 군인들의 세계, 파시스트의 세계이다. 밤하늘에 총격을 퍼붓듯 터지는 불꽃놀이 굉음에 아기는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 치하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시작된 영화는 아버지가 아기의 두 발을 움켜쥐는 순간 원시적인 피리소리와 함께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하는 고대의 신화세계로 넘어간다. 감독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적대적 관계를 조장하는 파시즘의 근원을 쫓기 위해 원초의 신화로 회귀하여 신화의 역사를 통해 인간의 역사를 조명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최초의 신으로 '만물의 어머니'였던 가이아의 위상 하락은 모계 중심 사회에서 가부장적인 부계 중심 사회로의 이행에 의한 결과이다. 오이디푸스의 저주받은 운명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딛고서 델포이 신전의 새 주인이 된 '태양의 신' 아폴론의 신탁에 기인한 것이다. 거친 숨소리, 분노와 증오의 눈빛, 내지르는 비명 소리 등 오이디푸스의 폭력성은 작열하는 태양 빛과 함께 권위적인 태도로 그를 모욕한 테베의 왕 라이오스에게로 향한다. 마치 '태양의 신' 아폴론이 오이디푸스의 친부 살해를 동조라도 하듯이 말이다. 결국 신탁대로 친부 살해,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걸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살한 어머니의 브로치로 두 눈을 찌름으로써 장님이 되어 전령의 손에 이끌려 테베를 떠난다. 부모의 비도덕적인 행위로 인해 초래된 죄악과 불행을 모두 짊어지고서…

시인이자 비평가이기도 했던 파졸리니 감독의 저항적인 예술 생애는 아버지와 파시즘과의 투쟁에 기인한다. 파시즘 체제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아버지 세대의 잘못을 대신 짊어지고 고통받아야 했던 전후 세대를 대표한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사라진 그 자리에 자본주의의 파시즘이 들어섰다. 그리고 눈먼 오이디푸스의 피리소리가 현대 도시의 허공을 맴돈다. 마침내 기나긴 방랑 끝에 도달한 들판, 삶이 시작되었던 그곳에서 비극은 끝난다. 새로운 신화의 탄생을 예고하며…

/시희(SIHI) 베이징필름아카데미 영화연출 전공 석사 졸업·영화에세이스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인천일보, INCHEONILBO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