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의병들 모아 일제와의 일전 꾀하다

1866년 9월23일 경기 여주군 내룡동 출생
문과에 소년 급제 이후 내부 참서관 봉직 중
왕비 시해 사건 일어나자 귀향해 의병투쟁
1898년 재임용됐다 을사늑약에 다시 낙향

1907년 9월 원주서 관동창의대장에 올라
화력 격차에 한계 절감…전국 의병에 격문
'13도창의대진' 구성·서울진공작전 호소
1만 대병 이끌고 일본제국주의자 척결 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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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남 이인영 의병장의 피체 당시의 모습(선친 3년상 중).
▲ 중남 이인영 의병장의 피체 당시의 모습(선친 3년상 중).

 

◆ 13도창의대진소 총대장 순국

융희 3년(1909) 8월13일 경성지방재판소 형사부 재판장 판사 츠카하라(塚原友太郞), 판사 나카무라(中村時章)·김의균(金宜均, 일제강점기 승승장구. 광복 직후 경북도지사. 영남일보 사장)은 13도창의대진소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에게 교수형을 선고하였다.

“충청북도 황간군 서면(西面) 도동(桃洞)

경기도 여주군 북면(北面) 내룡동(內龍洞) 출생

농업 이인영(李麟榮) 9월 23일생 42세

상기 자에게 대한 내란 수범(首犯) 피고 사건에 대하여 검사 이토 도쿠준(伊藤德順)이 입회하고 심문하여 판결함이 다음과 같다.

주문

피고 이인영을 교수형에 처한다.

압수한 증거 물건은 각각 제출인에게 반환한다.

(후략)”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권. 371~372쪽)

“내란범(內亂犯) 이인영(李麟榮)을 교수형에 처할 뜻으로 법부대신이 상주하여 가하다는 교지를 받들었다.” (<승정원일기>. 1909년 9월 13일)

이인영 의병장은 공소를 하지 않아 단심으로 형이 확정되었고, 재판에서 황제의 재가까지 한 달 만에 이루어졌으며, 7일 뒤인 9월20일 경성감옥에서 순국하였다.

 

◆ 이인영 의병장에 대한 진실

 

▲ 일제는 이인영 의병장을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하였다. 판결문 5-1, 5-5쪽(경성지방재판소. 1909. 8. 13.).
▲ 일제는 이인영 의병장을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하였다. 판결문 5-1, 5-5쪽(경성지방재판소. 1909. 8. 13.).

 

▲ '이인영진술조서'(<통감부문서> 8권. 1909. 6. 30.).
▲ '이인영진술조서'(<통감부문서> 8권. 1909. 6. 30.).

 

이인영은 1866년 9월23일 경기도 여주군 북면 내룡동(內龍洞: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서 부친 이현상(李顯商)과 모친 청주 한씨의 3남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초명은 인영(寅榮)이었으나 후기의병 때 인영(麟榮)으로 바꾸었고, 준영(竣榮)·시영(時榮) 등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자는 공진(共振), 호는 중남(中南)이다.

중남의 생년에 대하여 정리해 보면, 국가보훈처 간행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에는 1868년으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는 1867년으로, 족보(가첩)에는 1866년생으로 되어 있다. 이인영의 아우 이은영이 1868년 4월5일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판결문에는 “9월 23일생 42세”로, <통감부문서> 8권 '이인영진술조서'에는 43세로 기재되어 있다. 초명이 李寅榮인 것도 병인년(丙寅年·1866)과 관련이 있는 듯하고, 이들을 종합하면, 1866년생이 가장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중남은 국리(菊吏) 정동현(鄭東鉉)의 문하생으로 문과에 소년 급제하여 대성전 재임(大成殿齋任)으로 있다가 1888년 감찰을 시작으로 29세인 1894년에는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종전 이조참의)에 올랐다.

 

“정범조(鄭範朝)를 판중추부사로, 윤충구(尹忠求)를 감리원산항통상사무로, 특별히 이인영(李寅榮)을 참의내무부사로, 김경하(金經夏)를 참의교섭통상사무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 1894년 7월 5일)

 

“참의내무부사 이인영(李寅榮)에게 지금 통정대부를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승정원일기>. 1894년 7월 5일)

 

이어 동부승지를 거쳐 내부 참서관일 때 을미왜란(1895)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500여명의 의진으로 강원도 동북부 지방으로 나아가 의병투쟁을 전개하였고, 원주로 진출하여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과 호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남은 의진의 전투력을 보강하기 위해 급히 농토를 매각하여 청국인 용병 300명을 의진에 투입하고자 했으나 용병이 오는 도중에 일본군의 습격으로 그 일부가 사망하고 되돌아가는 바람에 큰 성과를 보지 못한 채 가산만 탕진하게 되었다.

중남은 국왕의 의병해산령에 따라 의병을 해산한 후 장차 일본군경과 싸우기 위해서는 신식 무기 구입이 필수적이라 생각하여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충북 덕산(현 제천시 속면)으로 가서 인삼을 재배하였으나 일제와 부왜인들이 불법이라고 비난하자 국왕은 특사령을 내려 이 사건을 묵인하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분비서원 시종, 군부 참령 등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며칠 뒤에 해임한 것으로 보아 국왕의 교지가 전달되지 않았거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남은 1898년 5월 군부 외국과장에 제수된 후 법부 법무국장(종2품), 평리원 수반판사를 거쳐 육군 부령 겸임 법관양성소장으로 활약했으나 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켜서 부왜인과 더불어 외교고문을 두고 사실상 외교권을 박탈하는 상황이 되자, 다시 벼슬을 내놓고 귀향했다. 을사늑약으로 광무황제 아래 통감을 두고 노골적인 국권침탈의 야욕을 보이자 다시 의병을 모아 강원 북부지방에서 의병투쟁을 벌였는데,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귀가했다.

그동안 중남과 호응하며 의각지세(角之勢)로 의병투쟁을 전개하고자 했던 이구채(李球采)·이은찬(李殷瓚) 등은 관동의병 500여명을 모은 후 문경으로 가서, “천붕지복(天崩地覆)의 날을 당하여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자의 은(恩)은 가벼운데 어찌 사사(私事)로써 공사(公事)를 미루리오!”하고, 관동의병을 이끌어 줄 것을 나흘 동안 설득하자, 마침내 중남은 집을 나서게 되었다.

 

▲ 1907년 9월~11월 이인영의 대규모 의진과 일본군 혼성대대가 격전을 벌인 경기 양평군 지평면 구둔치(구둔역은 1940년에 생김).
▲ 1907년 9월~11월 이인영의 대규모 의진과 일본군 혼성대대가 격전을 벌인 경기 양평군 지평면 구둔치(구둔역은 1940년에 생김).

 

◆ 13도창의대진소 설치하다

1907년 9월, 중남은 원주로 나아가 관동창의대장에 오른 후 지평·원주·횡성의 중간 지점인 삼산리(三山里:현 양평군 양동면 속리)를 의진의 중심지로 삼으니, 인근에서 모여든 의병은 2000명이 넘었고, 몇 차례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나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공격에 개별적인 의진으로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여주의진 대장 이구채, 이천의진 대장 조인환(曺仁煥), 장호원의진 대장 방관일(方觀一) 등 여러 의병장들과 의병투쟁의 방안을 모색한 끝에 원주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전국 의병들에게 격문을 보내 '13도창의대진'을 구성하여 일제를 물리치기 위한 서울진공작전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동포들이여! 우리는 함께 뭉쳐 우리의 조국을 위해 헌신하여 우리의 독립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야만 일본제국의 잘못과 광란에 대해서 전 세계에 호소해야 한다. 간교하고 잔인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인류의 적이요, 진보의 적이다. 우리는 모두 일본놈들과 그들의 첩자, 그들의 동맹인과 야만스런 제국주의 군인을 모조리 죽이는 데 힘을 다해야 한다.” (광무 11년(1907) 9월 25일 대한 관동창의대장 이인영)

 

중남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있을 때의 직속 부하이자 외국 공사관 업무에 능통했던 전 감찰 김세영(金世榮)으로 하여금 각국에 호소하는 격문을 등사케 한 후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전달 호소케 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각국 영사가 공사 업무를 대신하고 있었던 터였다. 이 격문에서 대한의 의병이 국제 공법상 교전 단체임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고, 해외동포에게도 격문을 보내어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중남이 관동의진을 이끌고 경기도 지평으로 나아갔을 때는 원근의 16진이 합하여 8000명이 넘었는데, 일본군사령부는 1개 대대 병력을 급파하기에 이르렀다. 그 해 11월7일, 관동의진은 삼산리 서쪽 구둔치에서 일본군을 급습하여 기선을 제압했으나 대포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일본군 공격에는 당할 수가 없어 패하고 말았다.

한편, 중남의 구상에 따라 전국의 주요 의병장들이 동참하게 되자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가 일제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관동의진의 중군장 이은찬과 포천·연천 등지의 의병을 이끌고 온 허위가 협의했는데, 두 사람은 전기의병 때 이기찬(李起燦) 의진에서 참모로 활약한 바 있었다. 협의 결과, 먼저 전국의병을 통할하는 원수부를 설치하고 각도의 창의대장을 선임하였다.

 

13도창의대진소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軍師長) 허위 / 관동창의대장 민긍호(閔肯鎬)

관서창의대장 방인관(方仁寬) / 관북창의대장 정봉준(鄭鳳俊)

교남창의대장 신돌석(申乭石) / 진동의병대장 권중희(權重熙)

호남창의대장 문태수(文泰洙) / 호서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통감부문서> 8권의 '이인영진술조서'에 의하면, 의병은 약 1만 명으로 추산하고, 그중 강원도 의병 약 8000명, 의병에 참여할 해산군인은 3000명 정도가 될 것으로 생각했으며, 경기도 양주에 집결했을 때의 대규모 의진은 민긍호 의진 2000여명, 중남이 이끈 의진 1000여명이었다.

중남은 13도창의대진이 서울진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먼저 강원·경북·충북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벌여 일본군을 서울로부터 밖으로 유인한 후 마지막에 양주로 집결하라고 했다. 당시 황성신문(1908년 1월25일)에는 의병 300여명이 열은동(悅隱洞) 부근에서 개성수비대와 교전했다는 내용과 일본군이 동대문 밖에 속사포(기관총)를 설치했다는 기사가 있고, 1월30일에는 의병이 입성한다는 풍설로 일본군 수십 명이 4대문을 지키고 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일제는 '이인영진술조서'에서 서울진공작전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907년 8월 그는 3진(陣)의 장(將)으로 8도에 격문을 보내 병사를 소집하고 정부 백관의 죄악을 헤아려 통감 및 각국 총영사에게 글을 보내 일본이 전약(前約:시모노세키조약-필자 주)을 어기는 행위가 있음을 호소하였음. 그러는 사이에 지평(砥平)에 이르자 16진의 병사를 합하여 8천여명에 달하였는데, 군사를 머물게 하고 2개월간 통감의 회답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음. 이 동안 3차례의 접전하였음. 11월에 이르러 홍천, 춘천을 거쳐 양주에 이르자 이때 허위, 이강년이 와서 합하여 무릇 48진, 약 1만에 달하였음. 허위를 군사(軍師)로, 이강년을 호서장(湖西將)으로, 이태영(李泰榮)을 진동장(鎭東將)으로, 김준수(金俊洙)를 안무장(安撫將)으로, 연기우(延起羽)를 대대장(大隊長)으로 삼아 바야흐로 경성에 들어가려고 하여 약 30리 지점에 달하였음. 이 동안 전투가 38회에 달함.” ('이인영진술조서', <통감부문서> 8권, 1909년 6월 30일)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