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동구 중심 상권인 수문통로 초입 모습.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2단계로 완화된 14일 오후에도 차량이나 행인 발길이 뜸했다. /김원진 기자 kwj7991@incheonilbo.com

 

 

인천 산업단지 분포도를 펼쳤다. 서구와 미추홀구의 경계에 인천기계산업단지, 주안국가산업단지, 인천일반산업단지 등 3곳이 몰려 있고, 서구에는 청라1지구산업단지, 인천서부산업단지 등 2곳이, 나머지 지역에도 산단이 있다.

인천에 산단이 없는 곳은 중구와 동구, 옹진군이다. 그러나 중구는 인천항과 인천공항 등 인천을 넘어 한반도를 이끄는 국가 물류단지가 있고, 옹진군은 섬으로 분포돼 산단 조성에 한계가 따른다. 그러나 옹진군은 남북관계가 해빙되면 발전 가능성이 기대된다.

불과 반세기 전 동구 인구는 15만명을 넘었다. '동구' 자체로 자랑이었다. 인천 원적의 70%가 동구라는 설도 있다.

일제에 의해 조성된 산업화에 기대 해방 전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이어지며 동구는 산업화의 첨병이었다. 우리나라 유수 공장이 동구에 자리했고, 사람이 몰렸다. 각종 편의 시설이 동구에 자리했다. 왜정 때, 인천은 중구와 동구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중구와 동서남북구가 조성될 때 자그맣던 동구가 당당히 단일 구(區)로 우뚝 설 수 있던 건 인구에 더해 대한민국 산업화 기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0년 현재 동구 인구는 6만명에 턱걸이 중이다. 5만명 밑으로 미끄러지는 건 예고됐다. 주거환경개선사업과 도시 재개발로 숨통이 트이지만 소비할 곳이 마땅치 않아 동구 밖에서 해결한다. 인구 유입보다는 유출에 익숙하고, 타 지역 기생살이를 당연시한다.

동구의 시간을 한 세기 전으로 돌렸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국사편찬위원회, 동구사 등에 따르면 동구가 역사의 전면에 나온 것은 1866년 병익사옥(병인박해)을 이유로 프랑스 해군이 동구 물치도에 잠시 정박한 게 처음이다. 그 후 화도진과 묘도(괭이부리) 등에 포대가 조성됐다. 수도국산 동구를 떠올리면, 1906년 인천에서 처음 상수도가 개통된 곳이 동구 송림동이란 사실에 수긍된다.

동구 산업화의 태동은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을 첫발로 둘 수 있다. 경성과 인천으로 뻗은 경인공업지대가 퍼지며 1936년 일본인이 동구 해안 매립에 나섰다. 구한말 만국공원 조계지에 기댄 유곽 건설로 만석동 매립이 이뤄진 후 30여년 지나서다. 인천부(仁川府)는 1936년부터 1941년까지 6개년 계속사업으로 공장용지 73만8000㎡를 조성했다.

김용하 전 인천연구원 연구원은 “동구 해안 매립의 특이점은 각 공장마다 전면에 소형선박이 자유롭게 하역할 수 있도록 매립한 점”이라며 “이 계획에 의해 톱니형 매립지가 되었고 북항(옛 북항)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고 추측된다”고 했다. 주인 없는 갯벌, 매립해 팔아먹는 방식은 지금도 행해진다.

송현3동은 전면 매립으로 공장용지가 탄생했고, 만석동, 송현1·2동, 송림4동, 송림6동, 화수2동이 부분매립으로 확장됐다.

동구 매립지에는 대표적으로 일본제분, 조선목재, 동양방적, 조선기계제작소, 도쿄시바우라제작소, 조선이연금속공업 등이 자리했다. 해방 이후에 톱니바퀴 매립지에 한국유리공업과 삼광조선, 세양물류 등이 세워졌다.

평균 2만명이 근무했던 한국유리공업, 동대(東大)라며 으쓱이던 동양방적, 군수기지로 바뀐 뒤 잠수함을 만들고 아카사키촌을 탄생시킨 아픈 역사의 현장 조선기계제작소 등은 어떻게 변했을까. 동구 성냥공장(조선인촌회사)은 애잔하기만하다. 노동운동의 효시요, 이념의 도화선이였던 곳. 바로 '동구'였다.

이후 조선목재는 만석비치타운으로 변했고, 동양방적은 동일방직으로 사명이 바뀐 후 베트남으로 떠났다. 조선기계제작소는 대우중공업을 지나 두산인프라코어가 인수했지만 풍전등화다. 도쿄시바우라제작소는 일진중공업에 팔린 후 충남 홍성으로 떠났다. 조선이연금속공업은 동국제강과 인천제철(현대제철)이 됐다. 인천제철, 동국제강, 일진전기, 대우중공업, 한국유리로 이어졌던 동구 대표기업체. 안정적 일자리를 넘어 인천의 상징이던 동구 대기업의 명맥은 위태롭다.

동구의 쇠락은 동구 기업체와 운명이 같다. 일이 없으니 지역을 떠나는 것은 당연하다. 편의시설이 줄면 그나마 남았던 사람들도 주변을 기웃한다. 악순환이다.

/이주영·김원진·이창욱·이아진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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