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어둠을 뚫고 바다에서 긴밀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어민으로 가장한 켈로 부대원 6명이었다. 한국측 3명과 미군측 3명의 특공조. 이들은 1950년 9월15일 0시를 기해 팔미도를 점령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바로 인천상륙작전을 펼치기 위한 전초전. 앞서 켈로 부대원들은 곳곳에 설치된 기뢰를 찾아내는 한편, 연합군 군함이 무사히 인천 앞바다에 진입할 수 있도록 바다 상태와 항로 수심을 측정했다. 이들은 마침내 북한군에게 팔미도를 탈환해 디데이(d-day)에 등대불을 밝혔다. 인천상륙작전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전공을 세운 셈이다.

팔미도 등대 불빛을 따라 집결한 261척의 함정에선 일제히 인천시내를 향해 불을 뿜었다. 이 때 함포 사격으로 중구 일대는 쑥대밭으로 변했다. 개항(1883년) 이후 애써 일궜던 시가지가 하루 아침에 사라졌다.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천에 상륙한 7만5000여명의 연합군은 진격을 거듭해 결국 9월27일 수도 서울을 수복하며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KLO는 '주한 연락처(Korea Liaison Office)'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명칭이다. KLO의 한국어 발음을 따서 켈로 부대라고 한다. 1949년 주한미군이 전투 병력을 철수하면서 첩보 수집을 위해 창설한 비정규전 부대다. 미국 극동군사령부 직할로 조직됐다. 이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는 비정규군으로서 적진에 침투해 첩보 수집, 후방 교란, 방해 공작, 양민 구출 등 특수 임무를 수행했다. 한국전쟁 중 많은 전공을 세워 유명세를 떨쳤다. 1954년 해체된 뒤 잔류 부대원들을 주축으로 '특전사의 모체'를 꾸렸다고 알려졌다.

팔미도 등대는 이렇게 한국전쟁 전세를 일거에 뒤바꾼 인천상륙작전과 아주 밀접하다. 이 등대가 지난 15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557호)로 이름을 올려 주목된다. 팔미도 등대는 1903년 4월 높이 7.9m, 지름 2m 규모로 준공됐다. 그 해 6월1일 점등됐으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등대로 꼽힌다. 점등 100주년을 맞은 2003년 퇴역했지만, 바로 옆에 위성항법시스템을 갖춘 첨단 등대를 세웠다. 사적 지정일은 인천상륙작전 70주년 기념일이기도 하다. 문화재청은 “국내 현존 최고(最古) 등대로서, 6·25전쟁 국면을 일시에 뒤바꾸는 데 기여한 역사적·상징적 가치를 지닌다”며 사적 지정 이유를 밝혔다.

팔미도(중구 무의동)는 인천항에서 남서쪽으로 15.7㎞ 떨어져 있다. 작은 바위섬들이 연결된 형상을 띤다. 마치 여덟 팔(八)자처럼 양쪽으로 뻗어내린 꼬리와 같아 팔미도(八尾島)라고 불렸다.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 연안부두에서 운항하는 유람선을 타면 1시간 안에 간다. 팔미도에선 소사나무 군락지를 거닐며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해가 질 때 생기는낙조는 '인천 8경'의 하나로 꼽힌다. 환상적인 노을을 한번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