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편 어려워 중학교도 진학 못한채
서울 올라가 돈 벌었지만 몸 망가져
고향 와 아버지 따라 전국서 꿀 채취
노력끝에 꿀유자차 세계점유율 1위

 

1962년, 13살의 어린 나이에 무작정 서울행 열차를 탔다. 머릿속엔 오로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공장과 식당 등을 다니며 힘들게 일해서 돈도 벌었다. 하지만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결국 3년여의 서울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포천에서 ㈜꽃샘식품을 운영하는 이상갑(71·사진) 대표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돈을 벌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다시 고향인 전북 임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날이 캄캄했다. 그러던 중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1965년 양봉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돌며 꿀채취를 하면서다. 이때부터 그는 건강을 되찾으면서 양봉 전문가의 꿈을 키웠다. 꿀벌처럼 성실하게 한 우물을 판 그는 어느덧 양봉으로 잔뼈가 굵은 장인으로 성장했다. 1982년에는 ㈜꽃샘식품이란 회사를 설립,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밤낮없이 하루도 쉬지 않고 제품을 만들었다. 제품 판매와 홍보를 위해 전국을 누볐다. 그러나 판로개척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포기할 법도 했지만,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정직하게 생산한 제품들이 인정받기 시작했다. 근면 성실하게 발로 뛴 노력이 성과를 낸 셈이다. 이런 노력으로 1995년엔 사업이 급성장했다. 4명으로 시작한 직원은 어느새 120여명으로 늘었다. 연 매출도 400억원에 달할 정도로 꾸준했다.

끊임없이 제품 개발과 품질 개선에 노력한 결과다. 실제 이 대표는 소비자 중심의 정직한 제품을 생산·판매하기 위해 적극 노력해왔다. 이러다 보니 꽃샘식품의 제품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2006년 12월 빅토르 유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방문해 양봉기술을 배울 정도였다.

그러자 이 대표는 해외시장 개척에 온 힘을 쏟았다. 매년 전 세계 유명식품 박람회에 참여해 제품을 전시하고 홍보했다.

2011년에는 석·박사 출신의 연구원을 영입해 모든 생산설비를 자체 제작하는 등 기술력을 높였다. 과감한 투자는 결실로 돌아왔다. 입점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코스트코에서 제품을 인정해 2012년부터 입점에 들어갔다.

현재 이 회사가 생산하는 제품은 꿀로 만든 유자차, 대추차, 생강차 등 벌꿀 제품 7종과 액상 차류, 인삼제품류 등 120여종이다.

이 제품은 국내는 물론 미국, 캐나다, 일본, 중국 등 해외 36개국에도 수출하고 있다. 현재 꽃샘식품은 국내 꿀차 업계 1위, 꿀 유자차 세계시장 점유율 1위다.

16살에 양봉업과 인연을 맺은 어린 소년이 55년의 외길 인생을 통해 벌꿀차(茶)로 세계를 석권한 것이다.

이상갑 대표는 “인류의 생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가 꿀벌”이라며 “힘들고 지쳤을 때 꽃에서 생명의 근원을 찾았다. 꿀벌은 내 인생에 큰 힘이다”고 했다. 이어 “소비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기술개발에 집중하고 있다”며 “차별화된 제품을 생산해 2024년 매출 1000억원을 달성하고 글로벌 식품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포천=이광덕 기자 kd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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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식품 1000만불 수출의 탑 수상 ㈜꽃샘식품이 1000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이 회사는 꿀로 만든 유자차, 대추차, 생강차 등 벌꿀 제품 7종과 액상 차류, 인삼제품류 등 120여종을 생산하고 있다.2019년 기준 1000만불을 수출하는 성과로 지난 8일 제57회 무역의 날을 맞아 수출탑을 받았다.이상갑(71) 대표는 지난 1965년 양봉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돌며 꿀채취를 했다. 이후 1982년 포천에서 꽃샘식품을 설립해 사업가로 나섰다. <인천일보 9월17일자 16면>밤낮없이 하루도 쉬지 않고 제품을 만든 뒤 판매와 홍보를 위해 전국을 누볐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