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제물포 주민 일상 속 파고들어
부두노동으로 생계꾸리는 사람 늘어
하역작업·도로건설·가옥 건축 등
토박이 만으로 노동력 감당못하자
외지 노동자들 소문듣고 몰려들어
당시 노동자 수천·수만명 보도도
노동자들 인간다운 삶과는 먼 삶
조선인 같은 노동이라도 차별당해
다시 제물포항 근처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러나 실제 개항 초기 이곳 토박이 주민들에 관해서는 어디에도 구체적인 기록이 전하지 않으니, 여러 정황을 통해 추정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전호(前號)에서 언급한 대로, 제물포 주민들은, 자신들의 삶과는 상관이 없을 것처럼 여겨졌던 개항이라는 사건이 차츰 그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었고, 자연적으로 전과는 다른 생활 방식에 젖어 들어갔다.
개항이 변화시킨 전과 다른 삶의 방식이란, 말할 것도 없이 부두노동으로써 생계를 꾸리는 방식이었다. 즉, 고기잡이, 물질 대신에 한 사람, 두 사람, 외국 증기선에 매달려 화물을 운반하는 부두노동자로의 변신이었다.
더욱 이러한 제물포의 변화는 인근 지역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거기에 제물포항이 점차 활황을 띄면서 더 이상 토박이만으로는 늘어나는 노동력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고, 급기야 이런 소문까지 날개를 달고 외지로, 외지로 전해지면서 많은 노동자들을 끌어들였을 것이다. 당시 제물포의 실정을 신태범 박사는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이렇게 썼다.
개항 후 인천감리서(仁川監理署)와 인천해관(仁川海關)이 개설되면서 지계 설정도 끝나자 얼마 안 되어 기선에 화물을 싣고 내리는 하역 작업에서부터 도로 개설과 가옥 건축이 활성화되었다. 하역은 짐을 어깨에 메고 나르면 되고 공사장에서는 모군만 서면 되었으므로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튼튼한 신체만 가지고 넉넉히 감당할 수가 있었다. 한국인 목수와 미장이의 기술은 지계에서는 통하지 않았으나 한국 촌에서는 불티가 났다. 이러한 노동 사정이 또한 제물포의 매력이어서 더 많은 사람을 불러들였다.
한 마디로 신체만 건강하다면 누구나 다 받아들일 만큼 제물포는 일자리가 널린 매력적인 신천지였다. 원로 언론인 고일(高逸, 1903∼1975) 선생도 『인천석금』에서 '살기 좋은 제밀'로 소문난 제물포의 당시 자유로운 노동 여건을 언급하고 있다.
살기 좋은 '제밀'이란 것은 노일전쟁 후의 노동도시로 집결했었고 대일 수출의 주종인 쌀[精米]공장의 진출에 따라 봉건 이조 말에 토색당하고, 통감부(統監府) 시절 이후 토지 빼앗긴 세농과 소작인들이 소위 산업예비군(産業豫備軍)으로 정미직공이 되거나 칠통마당의 목도꾼이 되어 구름같이 모이게 된 그때부터였다.
이 같은 제물포의 매력을 반증하듯 1897년 7월3일자 독립신문은 이곳에 모여든 모군꾼만 무려 1000여 명에 이른다는 보도를 내놓는다. 그리고 인천항 활황의 최고조라고 할 수 있는 1935년 6월 당시, 쟁의(爭議)에 돌입한 부두노동자의 수효만 5000명(또 다른 신문은 8000명을 언급하기도 한다.)에 이른다. 특히 인천 인구 “7만의 3분의 1이나 되는 방대한 숫자를 가진 자유노동자들의 유일한 직업장(職業場)인 대인천항(大仁川港)에서….”라는 조선중앙일보의 보도는 차마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렇게 쓰다 보면 얼핏 역설처럼 느껴지는 것이 있다. 조선정부가 그토록 개항을 꺼렸던 제물포가 결국 각지의 노동자들에게는 선망(羨望)의 '일자리 천국', '자유 노동시장' 그리고 '살기 좋은 제밀'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 장밋빛 이름, '제밀'이란 단순히 '밑바닥 노동으로 얻을 수 있는 호구지책의 기회만'을 말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 노동자들은 오로지 먹고사는 일 외에 한 푼어치라도 인간다운 생활과는 먼 삶을 살았다.
개항이 가져온 선물―문호개방을 통한 편리와 이익은 일인과 청인, 그리고 구미인들 차지였지 조선인 노동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요, 허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윤치호의 일기(日記)에도 그 같은 제물포 조선인 노동자들의 삶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 나는 가끔 지금과 마찬가지로 슬펐다. 때가 꼬질꼬질 묻은 희고 볼품없는 의복을 입은 조선인 노동자, 그들이 살고 있는 땅보다 별로 높지 않게 솟아 있는 조선인의 오두막집, 가장 더러운 청국인의 오두막도 거기 견주면 궁전 같다. 오물더미의 지독한 냄새가 사방에 풍기고, 지독히 가난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 도저히 방어 능력이 없는 조선을 슬프게 상징하는 듯한 벌거벗고 볼품없는 민둥산, 이런 모습들은 어떤 애국적인 조선인이라도 역겹게 하기에 충분하다.
윤치호는 갑신정변의 주동자인 김옥균(金玉均)과의 친분 때문에 중국 상해로 피신했다가 1895년 2월 12일, 10년 만에 귀국한다. 그리고 그날 제물포항에서 하루를 묵는다. 그러면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아진 것이 전혀 없는 제물포 조선인 노동자들의 가난한 생활상과 오물더미 환경을 자신의 일기에 한탄하듯 쓴 것이다.
사실 개항장 제물포, 조선인 거주 지역의 도로나 하수시설, 오물 문제 같은 것은 당시 독립신문이 나서서 개선을 촉구하는 논지를 펴나, 인천감리서든, 중앙정부든 어느 쪽도 선뜻 나서서 해결하려 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또 같은 노동이라도 노임의 차등이나 일의 강도(强度), 경중(輕重)에 따른 차별도 대부분 조선인이 당했다. 독립신문, 중외일보 같은 신문들이 이 문제를 기사화하여 목소리를 높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일인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이 홍여문 산허리를 잘러버리고 '턴넬'길을 만든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일인이 설계 감독했을 거요 석수쟁이[石工]는 이름 높은 중국인을 썼을 것이나 흙일과 잡일은 기술 없고 돈 없던 우리 노무자들이 담당하였다는데….
역시 『인천석금』의 글인데, 1908년에 개통된 중구 송학동 소재 홍예문(虹霓門)의 역사에도 이 같은 '한국인 하대(下待)', '찬밥 한국인'의 씁쓸한 비화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물포 개항은 이런 면에서도 주인인 한국인과 한국인의 삶을 멀리멀리 빗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김윤식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