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코로나 시대의 한가위
[썰물밀물] 코로나 시대의 한가위
  • 정기환
  • 승인 2020.09.14 17:02
  • 수정 2020.09.14 17:02
  • 2020.09.15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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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환 논설실장

'1897년의 한가위.'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첫 문장이다. 무색 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닌다. 차례가 끝난 뒤 마을 타작마당에서는 빠른 장단의 꽹가리 소리, 느린 장단의 징소리가 울려퍼진다.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참새떼들도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하동 악양고을 평사리 마을의 옛 추석 풍경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박경리 선생은 추석을 '풍요롭고 떠들썩하면서도 쓸쓸하고 가슴 아픈 한산 세모시 같은 축제'라 했다.

▶1972년의 추석 명절은 나훈아의 '고향역' 기적소리가 전국을 뒤덮다시피 했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이쁜이 꽃분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흰머리 휘날리며 달려온 어머님을/얼싸안고 바라보았네/ 멀어진 나의 고향역' 산업화 시대, 일을 찾아 도시로 떠나갔던 아들 딸들이 추석을 맞아 꿈에도 그리던 고향 향리로 돌아오는 장면. 반백년 이전 이 땅의 한가위 풍경을 고스란히 담았다. 공식적으로는 명절 휴가가 하루뿐이던 시절이다. 그래도 달빛에 밤을 새워 산 넘고 물 건너 고향으로 줄달음하곤 했다. 이 고향역의 모델은 전북 익산의 황등역이었다고 한다.

▶그 한가위가 올해는 사뭇 다른 풍경으로 다가오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이다. 정부도 “추석 귀성을 자제해 달라”고 권고했다. 이후 맘카페 등에서 며느리들이 들고 일어났다. '왜 권고냐. 아예 금지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거다. '시'자로 시작되는 시금치도 싫다는 며느리들인가 보다. 이런 기류들이 통했는지 엊그제 정부가 추석을 전후한 특별방역기간을 예고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 이제 당당하게 명절 시댁 패스' 등의 댓글이 올라온다. 반대로 고향 마을에는 '아들 딸 며느리야, 이번 추석에는 고향에 안와도 된당께'라는 현수막이 걸렸다고 한다.

▶추석을 맞기 위한 산소 벌초도 '대행'이 권고됐다. 조용필의 초기 작 중 '간양록'이라는 노래가 있다. 임진왜란 의병대장 강항 선생이 포로로 일본에 붙들려 가 지은 시를 가사로 한 노래다. 지순한 조선의 선비는 적국의 땅에서도 조상 산소를 걱정한다. '선영(先塋)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라고. 예년이면 추석을 앞둔 주말, 고속도로는 온통 벌초행렬로 막혔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선영 뒷산 잡초마저 농협이나 산림조합이 대신 뜯어주도록 바꿔 놓았다. 온라인 성묘도 수천년 이래의 첫 추석 풍경이다.

▶고약한 코로나19는 만나서 즐거워하는 꼴을 못참는 모양이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코로나19 방역을 '단체 줄넘기' 운동에 비유했다. 아쉽지만 이번 추석은 이 줄넘기에 동참해 서로를 격려해야겠다. 그래서 내년 추석은 고향역에서 흰머리 휘날리며 달려온 노모를 얼싸안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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