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시작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인천에도 닿았다. 지금 인천 중구청 위치에 있던 인천시청 앞에 사람들이 모여 인민군 입성을 환영하는 연설과 춤판을 벌였다. 당시 인천에서 활동하던 '바닥빨갱이'(빨치산 등 토착 좌익)가 중심이 됐다. 인천중학교 졸업반이었던 김양수(사진) 문학평론가도 마침 그 옆을 지나갔다.

“처음엔 뭔 구경거리인가 싶어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연설자나 주최자들 하는 말이 너무 뒤숭숭해 금방 자리를 떴어요. 며칠 있다가 수원에서 경찰과 군인들이 몰려와 그 행사에 있던 좌익 인사, 일반 시민 할 거 없이 다 잡아갔습니다. 그 시절 인천시청 내에 인천교육청도 있었는데 집무 보다가 구경 나온 황광수 인천시교육감도 잡혀갔을 정도죠.”

전쟁 도입부. 인천 역시 뒤숭숭했다. 인민군들은 동네 청년들을 죄다 잡아다가 의용군으로 편입시켰다. 그렇게 전선으로 나가선 최전방에서 많이들 목숨을 잃었다.

“의용군 징집을 피하려고 집 이중 지붕 사이에서 여름을 지냈어요. 한낮에는 양철 지붕이 달궈져 숨이 막혔습니다. 이불 깔고 위에서 버텼어요. 동네 반장 아저씨가 단속 정보를 줘서 그나마 나왔다 들어갔다 했죠. 인천 시내에선 도저히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해 가족들과 함께 소래 지인 댁에 잠깐 피신 가 있다가 쌀이 고파 홀로 집으로 가려고 주안 석바위쯤 지나고 있었습니다. 서쪽 바다가 미군 군함으로 새까맣더라고요. '아, 뭔가 일이 터지겠구나' 했는데 그게 9·15 인천상륙작전 전조였어요.”

마을에 '내일 함포사격 개시와 함께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전개된다'는 단파방송이 흘렀다. 그의 할아버지는 인천이 불바다가 될 거라며 소래에 있는 가족들 곁에 있다가 오라고 손자를 붙들고 간곡히 타일렀다.

1933년 인천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난 김양수 문학평론가는 인천을 대표하는 원로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한국전쟁 직후 청년기부터 “평론이 희귀하던 시기에 평론다운 평론 쓴다”는 평가를 받으며 문단에서 이름을 알렸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물론이고 선생님들까지 인민군 의용군 등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학교가 휑했어요. 교장 선생님은 남은 학생, 선생 앞에서 한숨을 크게 쉬었죠.”

그 일이 있고 3년 뒤인 1953년, 김양수 평론가는 모윤숙 시인이 발행한 잡지 <문예>에 '청마 유치환론'을 게재하면서 문단에 등장한다.

 

/탐사보도부=이주영·김원진·이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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