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통학생' 민왕기씨 “증기기관차 낡아 뻑하면 늦어…여름엔 더워 지붕 올라가기도”
'소래 토박이' 오정자씨 “항상 지각해 학교로 매일 뛰어…남학생들 표 검사 전 뛰어내려”

 

▲ 수인선 협궤열차. /연합뉴스
▲ 수인선 협궤열차. /연합뉴스

 

 

민왕기(78·경기도 부천시·사진)씨는 안산시 원곡에서 나고 자랐다. 원곡은 상급학교 진학의 기준 지역이었다. 민씨에 따르면 원곡을 포함한 서쪽 지역 학생들은 주로 인천에 있는 학교로 진학했고, 동쪽 지역 아이들은 수원 학교로 진학했다.

민씨는 1955년 인천사범병설중학교에 입학해 인천사범학교를 졸업하기까지 6년간 수인선을 타고 안산과 인천을 오갔다. 협궤열차 수인선은 항상 만원이었는데 대부분 통학생과 농산물을 파는 장사꾼들이 이용했다. 연착을 밥먹듯 하던 수인선이라 직장인들은 타고 싶어도 탈 수가 없었다.

“기차가 뻑하면 늦었어요. 협궤열차가 증기기관차인데 너무 낡아서 물을 끓이는 물통이 시도 때도 없이 터져 기관사들이 나무를 깎아 터진 부분을 그 때 그 때 막았죠. 기차는 주저앉아 버린 상태죠. 한두 시간 늦는 건 기본이라 지각은 항상 맡아 놓았죠. 저녁 기차를 놓치면 집에 걸어가야 하니 저는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도 못하고 갔는데 어김없이 기차는 늦었죠. 기차가 어디쯤 있는지, 언제 올지도 모를 때가 많아서 기차가 오면 적당한 역에서 타야지 생각으로 철길을 따라 걸었는데 결국 오지 않아 걸어서 집에 도착한 적도 많았어요.”

힘들었던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한 자락 추억으로 남을 때가 많다. 민씨에게 과거 수인선이 마치 그랬다.

“여름이 되면 아주 찜통이어서 땀이 범벅이 됐어요. 열차 칸도 많지 않고 화물도 실어야 하니 항상 자리가 없었어요. 그래서 여름이면 기차 위로 올라가 지붕에 앉아가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위험해도 어떡합니까, 타야죠. 지붕에 올라가면 석탄재랑 수증기를 맞아서 옷이 새카매지죠. 장사하는 사람들도 많이 타고 다니다 보니 '쓰리꾼'(소매치기)도 많았어요. 워낙 좁고 사람들이 많이 타니까 몸이 부딪히고 손이 왔다갔다 해도 이게 훔치는 건지 미는 건지 몰라 당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민씨는 “요즘 같으면 낭만으로 한 번 타보자 그러겠지만 그 때는 끔찍하게 타기 싫었다”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좀 더 많이 탈 걸 그랬나 생각도 난다. 수인선이 완전 개통하면 수원을 자주 오가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오정자(67·여·인천 남동구 논현동·사진)씨는 인천 소래 토박이다. 결혼 후 3년 정도 타지에서 살았지만 그 외엔 항상 소래에서 살았고 지금도 그렇다.

수인선은 오씨의 발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학교를 오가는, 성인이 된 뒤에는 직장을 오가는 중요한 교통 수단이었다. 오씨 역시 민왕기씨와 마찬가지로 수인선 하면 '지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동구 배다리 쪽에 영화여자중학교를 다녔어요. 3년 내내 열차 타고 통학했는데 열차가 느려서 그런지 항상 늦게 와서 지각했어요. 도착하면 기차에서 내려 치마 펄럭이면서 학교로 매일 뛰었던 기억이 나네요.”

협궤열차의 '느림'이 만든 또 다른 기억이 있다. 바로 무임승차다.

“기차가 느려서 남학생들은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정도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기차가 도착할 때쯤 되면 열차에서 그냥 뛰어내려서 학교로 가는 남자애들이 많았어요. 그 때는 지금처럼 열차 탈 때 표 검사를 하지 않고 내릴 때 검사를 했는데 그걸 피하려고 했던 거겠죠.”

수인선 주 이용객은 학생들과 보따리상들이다. 수인선은 경기 서남부 쪽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인천으로 들어오는 통로 역할을 했다.

“장사하는 분들이 달월이나 군자 이 쪽에서 농산물들을 가지고 와서 송도역에서 많이들 팔았어요. 지금도 생각나는 게 알록달록한 찐 옥수수도 팔았는데 그게 참 맛있었어요. 바로 따서 쪄서 오는 거라 맛있을 수밖에 없었죠. 그걸 팔러 온 사람이 있으면 열차 내에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죠. 그 옥수수 먹으려고 기차 올 시간 맞춰서 기다렸던 적도 많아요.”

졸업 후 미추홀구 학익동 쪽에서 직장 생활을 했던 오씨에게 수인선은 이젠 통근 열차가 됐다. 새로 개통한 수인선도 이용하고 있지만 과거 협궤열차가 주던 낭만은 없어 아쉽다는 오씨.

그는 “당연히 있던 게 사라지고 나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며 “과거 협궤열차를 잘 활용해 소래포구를 중심으로 관광열차 같은 형태로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천의 자원이자 역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탐사보도부=이주영·김원진·이창욱 기자 leejy96@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