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은 종교 아닌 학문, 끝없이 신념 의심

 

▲ 가장 널리 알려진 최제우 선생의 영정. 1933년 천도교에서 고희동 화백에게 위촉하여 그린 초상화.
▲ 가장 널리 알려진 최제우 선생의 영정. 1933년 천도교에서 고희동 화백에게 위촉하여 그린 초상화.

 

학문(學問)은 예부터 내려오던 용어로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지만, 종교(宗敎)는 20세기 초 일본을 통해 들어 온 용어로 자신의 신념을 믿는다. 동학이 학문인 이유다. 따라서 동학은 끊임없이 배우고 물으며 진리를 찾으려 한다. 선생은 화재로 인해 집을 떠났다. 화재가 필연인지 우연인지 모르나 이 화재가 동학의 시초임엔 분명하다. 그러고 득도한 지 겨우 4년 만에 선생은 이승을 떠났다. 선생이 하늘나라 어디로 갔는지 이승에 있는 필부인 나로서 운운할 바가 못 되고. 계속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선생은 득도한 다음 해인 1861년 음력 6월부터 본격적으로 동학 포덕활동을 시작하고 ‘포덕문’을 지었다. 동학(천도교) 개조(開祖)로서 첫 걸음이었다. 이 해 동학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 1861~1922)가 이 세상 빛을 보았으니 우연치고는 예사롭지 않다. 곧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이 입도하니 이 이가 동학 2대 교주가 된다.

이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자 같은 해 11월에 경주 일대 유림들이 박해를 가한다. 선생은 이들을 피해 전라도 남원 교룡산성 은적암(隱寂庵)으로 피신하여 ‘논학문’(일명 동학론)_‘안심가’_‘교훈가’_‘도수사’ 따위를 짓는다.

39세인 1862년 3월에 남원에서 경상도 흥해 손봉조의 집으로 돌아오다. 같은 해 9월 사술(邪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 진영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 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포교 방법의 신중성을 가져와 마음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이적만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극히 경계토록 하였다.

선생은 신도가 늘자 12월에 접주제(接主制)를 실시하다. 이는 선생의 탁견이었다. 접주제란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제도로 교세가 급격히 확대되어 경상도_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뻗쳤다. 1863년에는 무려 교인 3000여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40세인 1863년 7월에 최시형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 경상도 북부 지방 포덕 책임자)에 임명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선생을 체포하려는 계책을 세우고

있었다. 그해 11월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귀(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41세인 1864년 1월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고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10일 좌도난정률이라는 죄목으로 참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세도정치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국내는 정치 부패로 백성의 삶은 피폐하였으며 국외 정세 또한 요동치고 있었다.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이란 ‘그릇된 도로 바른 도를 어지럽힌 죄’이다. 누가 그릇되고 누가 정도인지 지금은 알지만, 저 시절에는 그 반대였다. 지금이라고 선생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다고 단언 못하니 저러한 역사를 귀감으로 삼아 우리 삶을 반추해볼 일이다.

각설하고, 이제 <동경대전>으로 들어간다.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세상에 동학(東學)을 새롭게 알린 도올 선생 말부터 들어본다. 도올 선생 견해가 적확하기에 좀 길어도 그대로 인용해 본다.

“동학이 창도된 애초로부터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동학을 믿는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지금도 이러한 표현은 천도교단 내에서 운용되지 않는다. 동학의 동지들은 반드시 ‘동학을 한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동학은 ‘믿음’(Belief)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동학의 학은 ‘함’(Doing)일 뿐인 것이다. 함이란 잠시도 쉼이 없는 것이다. 동학은 했다 안 했다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믿음의 실체로서 나로부터 객화 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동학은 우리 삶의 끊임없는 실천일 뿐이다. 수운은 결코 하나의 종교를 창시한 사람이 아니다. 단지 선각자로서, 우리 삶의 실천의 실마리를 제공한 큰 스승님(大先生主)일 뿐이었다. 그는 동학을 하나의 종교교리로서 체계화한 적이 없으며, 교단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자신을 교주로 생각한 적이 없다. 접(接)제도라 하는 것도 사회적 실천을 위한 상부상조의 운동조직이었을 뿐이었다.” (표영삼, <동학 1>(통나무, 2004), 13-14 인용)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