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일 생명평화포럼 상임대표

자유공원은 송월동에서 태어나 전동에서 신혼시절까지 보낸 필자에겐 많은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다. 반바지에 멜빵을 매고 긴 양말을 신은 아이가 솜사탕을 들고 좋아 웃는 다섯 살 무렵 사진 속 배경엔 맥아더 동상이 서있다. 날이 잘선 바지에 망원경을 목에 걸고 우뚝 선 멋쟁이 맥아더 장군의 동상 주변은 인천상륙작전 부조도 함께 있어 유년시절엔 술래잡기 놀이터로 안성맞춤이었다.

학창시절엔 도서관에서 나와 저녁 도시락을 까먹고 하교하는 여학생들에게 휘파람 날리며 찾아간 으쓱한 구석도 맥아더 동상 뒤편 벤치였다. 그리고 보니 졸업앨범 사진 찍으러 친구들과 올랐던 추억도 자유공원에 담겼다.

미소를 지으며 추억을 해야 할 자유공원이 또 다른 기억으로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 참 안타깝다. 필자가 무역회사를 다니고 있었던 1990년 여름과 가을 사이 그쯤이었다. 서울에 출장을 온 미국의 거래처 파트너가 필자가 사는 인천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한국 방문이 처음이라며 자신을 “극동아시아 정치를 전공했고 코리아의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아 한국담당을 지원했다“고 스스로 소개했던 프랑스계 미국인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휴일임에도 그의 제안을 받아 주었다. 그를 인천역에서 만나 차이나타운을 거쳐 자유공원으로 안내했다. 맑고 높은 구름에 볕이 좋은 날 오후 맥아더 동상을 무심코 바라보던 그가 동상 가까이 다가가 설명문을 읽고 이곳저곳 주변을 살피고 다시 동상을 유심히 보며 “맥아더 장군이네” 짧게 혼잣말을 하고는 필자에게 물었다. “이 공원 이름이 뭐야?” “자유공원”이라고 답하자 그는 놀란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미스터 정, 지금 자유공원이라고 했어? 자유?” 고개를 끄덕이는 필자의 얼굴을 그가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필자는 지금도 놀랐는지 실망했는지 뭐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그 표정을 기억한다. 그의 표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그도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해서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그렇게 공원에서 노을이 물드는 인천 앞바다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는 즐겼다. 그리고 그가 외치는 원더풀 소리를 필자는 복잡한 심정으로 건성으로 들으면서 홍예문을 지나 신포동으로 옮겨 유서 깊은 중식당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며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자유공원에 무슨 문제가 있어?” 그는 밥부터 먹자고 했다. 얼마 후 식사를 얼추 마치고 남은 탕수육과 고량주를 앞에 놓고 그가 먼저 물었다.

“왜 그 자유공원으로 날 안내했어?”/ “그야 인천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이고 내게도 추억이 많은 곳이니까”/ “그 공원이 한국에 만들어진 첫 번째 서양식 공원이라며?”/ “그렇지~ 1889년에 우크라이나 토목기사가 설계해서 만든 공원이니까”/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맥아더가 그 공원에 왔었어?”/ “아니 거기서 보이는 월미도라는 작은 섬에 상륙했지”/ “그럼 그 공원 이름이 원래부터 자유공원이야?”/ “아니지, 원래 이름은 '만국공원'이었지. 각국 사람이 이용한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인데 전쟁 끝나고 1957년 맥아더 장군 동상이 세워지면서 이름을 바꿨어~”

필자는 말을 더듬으며 간신히 말을 마치고 거푸 잔을 들이켰다. 물끄러미 필자를 쳐다보던 그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말을 이었다. “독립운동과 해방이 '자유'를 가져오는 것 아닌가? 네 나라는 대만과 달리 독립운동도 열심히 했던데...”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외국인인 내가 할 말은 아닐지 모르겠는데 맥아더 동상이 왜 그리 높아 광화문에 이순신 장군 동상보다도 더 크고 높이 서있는 것 같아 우러러 보려니 목이 아프더라!”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얼굴이 화끈거려 연신 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그를 배웅하고 휘청거리며 홍예문을 지나 가로등을 붙잡고 부끄러운 속을 토해내고 다시 만국공원에 올랐다. 유년 시절 누구든 그 공원을 '자유공원'이라고 부르면 “으흠~ 만! 국! 공원이여!“ 또박또박 목청을 키우시며 곰방대를 탁탁 치시던 동네 할아버지가 달빛 속에서 필자를 내려다 보셨다.

K방역이 세계에 모범이 되고 봉준호감독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를 휩쓸고 BTS가 '다이너마이트'로 빌보드 핫100차트 1위에 올라도 그 공원에 오르면 그 미국 친구의 표정이 떠오르고 그 할아버지의 쩌렁쩌렁한 소리가 귓전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