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32. 13도창의대진 견인차 이은찬 의병장(중)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32. 13도창의대진 견인차 이은찬 의병장(중)
  • 인천일보
  • 승인 2020.08.30 17:49
  • 수정 2020.08.31 15:43
  • 2020.08.31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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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군 휘몰아쳐 도성 지척까지 진군하다



이인영의 관동창의소, 삼산리 중심 투쟁에 한계 절감
전국 의진에 '서울진공 연합작전으로 국권회복' 격문
횡성·지평·춘천 등지 의병 규합하고 원수부 중군장 돼

<독립운동사> 1권 '평민 의병장 부대 배제' 기술 오류
이인영 진술조서에 '신돌석, 영남 창의대장 선임' 기록
동대문 밖 30리 진출 전적, 허위 의진 공적으로 둔갑도
1993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인영 편'에서야 교정
▲ 1. 1907년 9월 이인영·이은찬·이구채의 대규모 의진과 일본군 혼성대대가 격전을 벌인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삼산리 일대.

 

◆ 13도창의대진 결성하여 서울진공작전 펴다

이인영은 원주로 나아가 관동창의대장에 오른 후 지평·횡성·원주의 중간 지점인 삼산리(三山里:현 양평군 양동면 속리)를 의진의 중심지로 삼으니, 인근에서 모여든 의병은 2000명이 넘었지만, 일본군의 공격에 개별적인 의병투쟁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관동의진의 중군장 이은찬, 여주의진 대장이자 관동의진의 총독장 이구채(李求采), 이천의진 대장 조인환(曺仁煥), 장호원의진 대장 방관일(方觀一) 등 여러 의병장들과 의병투쟁의 방안을 모색한 끝에 원주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전국 의병들에게 연합하여 서울진공작전을 벌여 일본군을 물리치고 통감부를 없애서 국권을 회복하자고 호소하는 격문을 보냈다.

그 후 이은찬은 원주를 떠나 횡성·지평·춘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모으는 데 진력하였으며,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 격문을 띄워 11월에 경기도 양주 방면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드디어 의병들이 양주에 집결하자 각 의진의 의병장들은 이인영을 13도창의대진소 총대장으로 추대하였고, 자신은 이인영 의병대장이 직접 이끄는 원수부(元帥府)의 중군장이 되었다.

“문 : 네가 관동창의대장이라 칭할 당시의 부하 편성을 말하라. 명명해 창의부(倡義府)라든가 창의군(倡義軍)이라고 말하였는가?

답 : 관동창의소(關東倡義所)라고 칭하였습니다.

문 : 너는 단지 관동의 대장이고 한국 13도의 대장은 아닌가?

답 : 13도의 대장이라 칭한 적은 없습니다. 마침 을미(乙未:丁未의 오기-필자 주) 11월 양주에 집합하였을 때 각 주창자 등이 누군가 조종자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해서 대장들이 협의한 결과, 저를 13도창의대장에 추대하였으므로 제 마음대로 호칭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때는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각 군에는 제가 각각 진명(陣名)을 내렸습니다.“ ('이인영진술조서', <통감부문서> 8권. 1909. 6. 30.)

박은식 선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의진을 24개로 재편성하고 각 군의 장령(將領)으로 이구채, 정봉준, 채상준, 원재덕(元在德), 신양집(辛良集), 김회수(金會洙), 김선우(金善宇), 유해붕(柳海鵬), 정대무(丁大武) 등과 같은 이의 임명도 모두 이은찬 의병장이 한 것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이인영진술조서'에는 48진으로 편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은찬은 경기도 양근군의 유생으로 맨 먼저 관동의병의 깃발을 올렸으며, 그는 이인영이 인망을 얻고 있다 하여 24진으로 나눠 경성으로 진격하기로 한 것은 모두 그가 세운 계책이다.” (박은식 저/남만성 역, <한국독립운동지혈사>. 56쪽)

“1907년 8월 그는 3진의 장(將)으로 8도에 격문을 보내 병사를 소집하고 정부 백관의 죄악을 헤아려 통감 및 각국 총영사에게 글을 보내 일본이 전약(前約:종전의 조약-필자 주)을 어기는 행위가 있음을 호소하였음. 그러는 사이에 지평(砥平)에 이르자 16진의 병사를 합하여 8000여명에 달하였는데, 군사를 머물게 하고 2개월간 통감의 회답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음. 이 동안 3차례의 접전하였음. 11월에 이르러 홍천, 춘천을 거쳐 양주에 이르자 이때 허위, 이강년이 와서 합하여 무릇 48진, 약 1만에 달하였음.” ('이인영진술조서', 앞의 책)

 

◆ 독립운동사 오류 중심에는 <독립운동사>가 있다

<독립운동사> 1권에서는 “전국연합 의병부대 재편성 과정에서 당시 일본군경의 가장 두려운 대상이었던 신돌석과 평민 출신 홍범도·김수민 등과 같은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는 제외되었다. 이들 평민 출신의 의병장은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배제되었기 때문에 이후 의병부대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지 못하고, 전략적으로도 투쟁성과 기동전술이 미비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기술하였는데, 이것은 엄청난 오류였다.

'이인영진술조서'에는 이인영이 광무황제의 조칙을 받고 거의했는지에 대하여 상세히 묻는 장면에서 '이강년, 신돌석이 함께 있었음'이 나오고 있고, 특히 교남(영남) 창의대장으로 신돌석이 선임된 것이 나온다.

“문 : 그때 인솔하고 온 각도의 지휘자는 누구누구인가?

답 : 전라도는 문태수, 본명은 문태현(文泰鉉, 文泰瑞-필자 주)이라 하며, 충청도는 이강년, 강원도는 민긍호, 경상도는 신돌석, 평안도는 방인관, 함경도는 정봉준, 경기도는 허위, 황해도는 권중희(權重凞, 權重卨-필자 주)였습니다. 권중희는 그 후 제 배하에 속하였기 때문에 황해도는 대장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허위가 경기도와 황해도를 지배하고 박정빈으로 하여 황해도의 아장으로 삼았습니다.” ('이인영진술조서', 앞의 책)

<립운동사> 1권(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에는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기 직전 이인영 의병장은 아버지 부음을 듣고 문경으로 내려가고, 허위 의병장이 친히 정병 3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이르렀으나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의해 타격을 받고 물러나고 말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대한매일신보(1909. 7. 30.)의 '義兵總大將李麟榮氏의 史 續' 제목의 기사를 참고한 것이었다.

서울진공작전에 대한 우리나라 주요 사료는 대한매일신보(1909), 송상도의 <기려수필>(1955), 김정명의 <조선독립운동>(1967) 등이 있고, 일제의 <통감부문서> 제8권(1909) 등이 있다. <독립운동사> 1권에는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와 <기려수필> 의 내용을 모두 인용하였다.

 

▲ 2. 이은찬과 이구채가 이인영을 찾아가서 관동창의소 대장에 추대한 기사. (대한매일신보. 1909. 7. 28.)
▲ 2. 이은찬과 이구채가 이인영을 찾아가서 관동창의소 대장에 추대한 기사. (대한매일신보. 1909. 7. 28.)
▲ 3. 서울진공작전 관련 기사. (대한매일신보. 1909. 7. 30.)
▲ 3. 서울진공작전 관련 기사. (대한매일신보. 1909. 7. 30.)

 

◆ 동대문 밖 30리 진출한 의병과 의병장의 진실

서울진공작전에 대한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는 약 2년 뒤에 정리한 것이다. 비록 '군사장(軍事長)'이라 하였지만, 군사장(軍師長)을 맡은 왕산이 동대문 밖 30리에 육박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려수필> '이인영·이은찬 편'에서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군사(軍師:허위-필자 주)는 그 군려(軍旅:13도창의진-필자 주)를 정돈하고 진발(進發)을 준비하였다. 이에 있어서 이인영은 각도 의려(義旅:의진-필자 주)로 하여금 일제 진군을 재촉하고, 몸소 3백 명을 이끌고 먼저 동대문 외 30리에 이르렀다. 각군이 이르지 않았는데 일병이 먼저 쳐들어 와 서로 더불어 분전하였으나 적에게 대적할 수 없어 이에 퇴군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권, 507~508쪽)

<기려수필>에서는 이인영이 “몸소 300명을 이끌고 동대문 외 30리에 이르렀다.”는 기록인데, <독립운동사> 1권에는 이 내용을 정리해 놓고도 엉뚱한 내용으로 기술하였던 것이다.

이인영이 일본군 헌병대에 피체되어 신문을 받은 기록에서 자신이 2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되는 곳에 진출하였다고 했으니, <기려수필> 내용과 일치한다. 다만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한 의병의 수가 차이가 있다. 이는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한 13도창의대진 전체 인원은 약 2000명이고, 이인영이 직접 인솔한 직할부대는 300명이었다는 것이다.

“문 : 당시 경성 부근에 온 적이 없는가?

답 : 있습니다.

문 : 문 밖 20~30리 되는 곳에 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답 : 한리(韓里) 30리 되는 곳에 갔습니다.

문 : 무슨 용건이 있어서 왔는가?

답 : 대(隊:의병부대-필자 주)를 데리고 갔습니다. 인원은 약 2,000명이었습니다.” ('이인영진술조서', 앞의 책)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독립운동가'(1993년 9월) '이인영 편'에서는 “2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라고 하여 바로잡았다.

“선생은 이 격문에서 을사조약의 폐지와 13도창의대진소를 교전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한 뒤 2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중략) 선생은 눈물을 머금고 망우리고개를 넘지 못한 의병대에 후퇴명령을 내리고 패전의 진용을 재정비할 무렵, 1907년 12월 25일(양력 1908년 1월 28일) 부친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된다.”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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