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백범 김구((1876∼1949)와 인천과의 인연은 떼려야 뗄 수 없다.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고 밝혔듯, 인천에서 경험한 옥살이를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았다. 청년 김창수에서 독립운동 주역 김구로서 우뚝 선 계기로 작용했던 곳이 바로 인천.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원동력은 결국 옥살이 두 번의 담금질을 한 데서 비롯된 셈이다.

백범의 인천 옥살이는 '치하포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 시작됐다.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반감으로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한 그는 인천감리서(仁川監理署)로 이송됐다. 인천과 백범의 첫 '역사적 만남'이었다. '국모 원수를 갚았다'는 대의명분과 함께 '의로운 청년'으로 떠오른 그는 마침내 고종황제의 사면을 받았다. 여기엔 인천항 객주와 지사들이 열렬히 구명에 나서고, 눈물겨운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벌인 옥바라지가 한몫을 했다. 백범이 해방 후 처음으로 순시한 지역도 인천. 옥중 생활과 어머니 고생을 돌아보려는 까닭이었다.

김구에 대한 사면은 무죄를 의미하지 않았다. 사형 집행을 피했을 뿐이었다. 이처럼 기약 없는 옥살이에서 벗어나려고 그는 1898년 탈출을 감행해 성공한다. 그때 백범 도피는 지금도 '미스터리'한 여정으로 남아 세인의 관심을 끈다. 김구가 인천과 다시 인연을 맺은 때는 1911년. 신민회 사건에 연루돼 징역 15년 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14년 인천으로 옮기면서다. 당시 그는 인천 축항 공사 노역에 동원됐다. 이듬해 8월 가석방으로 나올 때까지 그는 여기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후 백범의 행적은 알려진 대로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박남춘 인천시장은 지난 15일 '제75주년 광복절 기념식' 경축사에서 “백범의 젊은 시절 발자취가 남은 중구 신포로 일대'청년 김구 거리'를 이르면 내년 말쯤 완공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민족의 지도자 백범이 '청년 김창수' 시절 일제에 항거하다 두 차례나 인천에서 감옥살이를 한 일을 기억해서다. 인천시 의뢰로 1세대 크리에이터 '양띵'이 김구 선생이 두 번 투옥됐던 중구 옛 도심의 인천감리서를 중심으로 탈출 게임 콘텐츠를 제작해 화제다. 백범의 탈옥 스토리를 구성한 양띵은 마인크래프트에서 옛 인천감리서 모습부터 재현한다. 죄수(백범)가 헌병 추적을 피해 인천감리서∼답동성당∼해광사(일본식 사찰)를 거쳐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탈출하는 시나리오를 짰다.

세월은 유수(流水)라고 했던가. 백범은 가고 이제 젊은이들은 가상 세계에서 그의 탈출 게임을 즐긴다. 이 프로젝트는 인천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세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한 새로운 시도다. 세계적 게임인 마인크래프트를 도시 마케팅에 활용한 최초 사례이기도 하다. 아무튼 많은 게이머가 백범의 탈출 경로를 따라가며 역사를 체험하고, 인천의 문화유산을 만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