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식당 바닥을 청소하며

불빛이 희망이라고 했던 사람의 말

믿지 않기로 했다 어젯밤

형광등에 몰려들던 날벌레들이

오늘 탁자에, 바닥에 누워 있지 않은가

제 날개가 부러지는 줄도 모르고

속이 까맣게 그을리는 줄도 모르고

불빛으로 뛰어들던 왜소한 몸들,

신문에는 복권의 벼락을 기다리던

사내의 자살기사가 실렸다 어쩌면

저 벌레들도 짜릿한 감전을 꿈꾸며

짧은 삶 걸었을지도 모를 일,

그러나 얇은 날개를 가진 사람들에게

희망은 얼마나 큰 수렁이었던가

쓰레받기에 그들의 잔재 담고 있자니

아직 꿈틀대는 숨소리가 들린다

저 단말마의 의식이 나를 이끌어

마음에 다시 불 지르면 어쩌나

타고 없는 날개 흔적을 지우려고 나는

빗자루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과연 희망의 실체는 무엇일까? 끝없이 노력하고 좇으면 내가 바라는 짜릿한 희망은 내게 안겨 와 줄까? 거기에 나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저 불빛에 부딪혀 죽은 날벌레들의 비참한 주검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날개는 찢어지고 단말마의 비명만이 가냘프게 묻어있는 주검들을 쓸어 담는 거친 빗자루….

쓰레받기 속으로 던져진 왜소한 주검은 그 무엇으로도 위무 받지 못한다. 타다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불빛을 향해 '짜릿한 감전'을 감행하는 존재라면 그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는 한 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이율배반적 가치 지향성을 갖고 있다. 일찍이 서정주는 '추천사'에서,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인간의 소망은 하늘에 가 닿았지만, 그넷줄에 매인 인간은 결코 하늘에 가 닿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운명적 한계다. 우리는 언제까지 희망이라는 허구의 불빛에 속아 위험한 비행을 계속해야만 할까?

누구나의 의식 속에도 등불 하나쯤 켜져 있고, 세상을 사는 누구라도 그 불빛을 향해 한 번쯤 몸을 던진다. 그것이 설령 지옥의 화염일지라도 날개짓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희망의 실체다. 희망에 부딪혀 죽지 않는다면 남은 삶은 캄캄한 동굴의 삶일테니, 우리는 다시 태어나도 불빛에 부딪혀 죽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날벌레에 불과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내는 방법은 오직 그것밖에 없으니까.

 

 

 

 

 

 

/권영준 시인·인천삼산고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