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한 영혼을 이데아 세계로 인도하는 '에로스'의 손가락
▲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 중 죽기 전 아센바흐 눈에 비친 타지오의 환영 같은 모습.

 

“미(美)와 순수의 창조는 정신적인 행위야.”

작곡가 아센바흐는 미를 오직 감각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친구 알프레드와 팽팽히 맞서며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해 논쟁한다. 감각을 배제한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아센바흐에게 친구는 순수함은 나이든 사람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냉정하게 말한다.

토마스 만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은 말러의 교향곡 5번이 영화 전편에 흐르며 애잔한 여운을 오래도록 남기는 이탈리아 거장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만년의 걸작이다. 영화는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휴양차 베니스로 간 작곡가 아센바흐가 소년 타지오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감정에 휘말리면서 결국 죽음을 맞는 비극적인 내용을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이미지로 담아내었다.

 

'정반합(正反合)'의 미학으로 도달한 이데아 세계

어둠에 잠겨 하늘과 구분이 모호한 바다 이미지로 영화가 시작된다. 카메라가 서서히 옆으로 이동하면 검은 연기를 내뿜는 증기선이 동이 트는 뿌연 하늘 아래 불안하게 흔들리며 바다 위를 나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어 증기선이 지나가면서 갈라놓은 바닷물이 서서히 합해진다. 이 오프닝 장면은 영화 전반에 흐르는 '정반합'의 미학을 함축하여 보여준다. 명망 있던 음악가로서 예술적 위기에 직면한 아센바흐는 베니스에서 휴양하는 동안에도 불쑥불쑥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편히 쉬지 못한다. 특히 금발의 미소년 타지오를 보는 순간 그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며 예전에 알프레드와 벌였던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논쟁 속에 다시금 휩싸이게 된다. 이성을 중시하는 아센바흐와 감성을 중시하는 알프레드 사이의 상반된 예술관이 정립, 반정립으로 과거 시점에서 팽팽하게 맞섬과 동시에, 타지오를 둘러싸고 아센바흐 내부에서 벌어지는 이성과 감성 사이의 정립, 반정립의 투쟁도 현재 시점에서 치열하게 전개된다. 그리고 카메라도 줌인, 줌아웃의 움직임으로 이 투쟁에 적극 가담한다. 감각적인 것을 통해서는 정신적인 것에 절대 도달할 수 없다고 믿었던 아센바흐는 타지오의 육체에서 느껴지는 감각적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만 이성을 잃고 점점 더 구제할 수 없는 나락의 길로 깊숙이 들어간다. 전염병에 대한 불안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잊은 채 하염없이 타지오의 뒷모습만 쫓던 그는 쓰레기가 널려 있는 광장 한가운데에서 아픈 심장을 움켜쥐고 주저앉아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자신의 추락을 멈출 기력도, 이성도 남아 있지 않은 그에게 이제 남은 일은 마지막 힘을 다하여 타지오의 마지막 모습을 보러 해변가로 나아가는 것이다. 숨을 거두기 전 그의 눈앞에는 손짓으로 바다 너머 먼 곳을 가리키는 타지오의 환영 같은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마치 저 너머에 아센바흐가 평생 동안 찾았던 참된 아름다움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는 듯이…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궁극적인 참된 실재의 세계인 '이데아 세계'를 상기시킴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에로스의 신적인 광기에 대해 말한다. 아센바흐가 타지오의 아름다움을 통해 이데아를 떠올리는 순간, 정립과 반정립의 변증법적 과정도 '합(合)'을 이룬다. 그리고 양손을 허리에 얹은 타지오의 환영을 쫓아 아센바흐의 영혼이 둥실둥실 떠나간다.

/시희(SIHI) 베이징필름아카데미 영화연출 전공 석사 졸업·영화에세이스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