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처럼 찾아온 해방 소식에
인천 시내는 환희의 도가니

본보, 역사적 현장 고스란히 담긴
희귀 사진들 입수·지면에 공개
▲ 일제가 항복한 후 인천에서는 연일 만세 행진과 시위가 벌어졌다. 치안은 여전히 인천경찰서의 일본인들이 담당했다. 연합군의 상륙을 기다리고 있던 시민들은 번화가인 경동 네거리에 '환영' 아치를 세웠다. 그 너머로 내동 소재 재판소(裁判所) 지붕이 보인다. /사진제공=조우성 주필

 

“해방이 왔다! 도둑처럼 왔다!”

1945년 8월15일, 이 땅의 백성들이 해방을 맞으며 부지불식간에 했던 말이다. 온 백성이 기쁨에 겨워 방방곡곡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와 손에 손을 맞잡고 부둥켜 안으며 만세 소리를 드높이면서 “해방이 도둑처럼 왔다”고 했다.

▶화보 3면

되새겨보면 의미심장한 시국인식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가 하루아침에 항복해 물러가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고, 더 잃을 것도 없는 식민지의 빈곤한 살림살이였지만 무언가 아쉬운 상실감에서 그렇게 표현했다고 읽게 되는 말이다.

내 나라, 내 군대가 일본군과 당당히 싸워 쟁취한 해방이 아니었다는 자괴적 상념이 모두의 가슴에 깔려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당장에 잔혹한 일제의 굴레에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으리라. 그리하여 남녀노소는 가릴 것 없이 거리로 거리로 쏟아져 나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온 인천 시내는 환희의 도가니였다.

그 같은 역사적 현장을 보여주는 희귀 사진들을 인천일보가 국내 최초로 공개한다. 조우성 주필이 최근 입수한 이 사진들은 1945년 9월8일 하지 군정관 휘하의 부대원으로 인천에 온 미 육군 제1395공병대대 소속 존 .F. 라이어던(계급 미상)이 촬영한 것이다. 그는 1944년 4월15일 센프란시코를 출발해 오키나와에서 종전을 맞았고, 1945년 9월 16일 인천에 도착했다.

조 주필은 “그동안 공백 같았던 1945년 8월15일 직후의 인천 모습을 미군이 찍은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며 “이 사진들이 해방 당시의 인천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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