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산하 경성방송국이 중계한 '천황'의 항복 선언 내용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눈물로써 얼싸안으며 저마다 문을 박차고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당시의 정황에 대한 생생한 '증언들이 있다.
"저녁 6시쯤 경동거리 애관극장 앞길에서 요란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기에 집을 뛰쳐나와 그리로 가 본 나는 참으로 놀라운 강경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애관극장 앞길을 메운 군중은 수백 명이 넘었는데, 이들이 언제 준비하였는지 '조선독립만세'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만세 삼창을 외치면서 내동 사거리를 지나 일본인들이 사는 동네로 행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물결 속에서 나는 삼촌이 말했던 태극기를 처음 보았다...일왕 담화 몇 시간 후에 그 깃발이 휘날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당시 인천사람들은 소련이건, 미국이건 간에 해방군이 곧 입성하여 왜놈들을 내몰고 곧 독립이 되는 줄 믿고 있었다...미군 도착까지의 공백 기간 동안 일본군이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흥분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인중 시절과 태극기에 대한 기억' 인하대 사학과 임명방 교수. 황해문화 제5호)
그렇다면 이 시기의 인천 거주 일본인들의 상황은 어땠을까? 일본 소재 '인천인회'의 회원들이 지난 1947년에 발행한 소책자 '인천인양지(仁川引揚誌·황해문화 2011년 봄호 전재)'는 이렇게 전한다.
"밤이 되면 조선인들이 횃불을 켜들고 거리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광희난무(狂喜亂舞)하는 일이 17, 18일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일본인을 습격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문을 잠그고 전전긍긍하였다...미군 상륙설에 대비한 퇴각 준비로 각 관청에서 서류를 소각하는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미군이 상륙하던 날(9월 8일) 오후 2시경에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려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총성은 연합군을 환영하는 시위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인천경찰서 서원 간의 충돌 끝에 빚어진 비극이었다.
양성혁(梁聖爀) 선생(전 인천상공회의소 검사역, 1997년 작고)은 일본 경찰 발포사건을 목도한 산 증인이다. 양 선생은 '주한미군 30년'(서울문사 편)에서 이렇게 밝힌다.
"미군이 상륙한 지점은 여객선이 드나들던 객선부두였다. 미군 상륙이 계속되는 동안 환영 인파와 이를 저지하려는 일본 경찰 사이에 숱한 충돌이 일어났다...인천보안대원과 조선노동조합원들이 미군 상륙을 환영하기 위해 부두에 나타난 것도 이때였다. 연합군 기와 플래카드를 앞세운 이들은 인파를 헤치고...선두 대열이 막 일본 경찰 경비 구역을 통과하려 하자 난데없는 총성이 연이어 터졌다."
이 사건으로 권평근(權平根 47) 조선노조 인천중앙위원회 위원장과 이석우(李錫雨 26) 보안대원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수명이 부상당했다. 일순간 그 자리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이는 패전국 경찰이 전승국 미군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닌 한국인들에게 발포한 불법이었다. 해방을 맞고서도 일경에게 총격을 당한 시민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맞서 싸울 총도, 정부도 없던 시민들은 9월 10일 시민장을 치르는 것으로 무력감을 달랠밖에 없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건국 용사'라고 쓴 관을 중앙에 두고 미국, 소련, 조선, 적기 플래카드 물결이 거리를 메웠다. 장례식은 천주교 답동성당에서 거행됐다. 건국위원회 의 한 인사는 인천역 광장 모임에서 "일본인을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죽이자"고 외쳤다.
그러나 인천 거주 일본인들은 그해 말까지 인명의 손실 없이 순차적으로 조용히 귀국길에 올랐다. 3년간의 군정(軍政)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군정청의 첫 포고문에 귀를 기울였던 시민들은 그 누구도 5년 뒤 벌어진 참혹한 6.25전쟁을 예상치 못한 채 독립 대한민국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글·사진=조우성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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