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순성(1878 ~1944)은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 함장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895년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가 동경고등상선학교에서 4년간 근대식 항해교육을 받고 1901년 한국인 최초로 항해사 자격을 취득했다. 1903년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군함을 (나라의 무력을 키운다는 뜻의) '양무호'로 명명하고 신순성을 함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 군함을 이끌고 인천항에 닻을 내렸다. 1904년 대한제국 두 번째 군함 '광제호'가 건조되자 다시 함장직을 맡았다. 광제호는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상선회사에 팔렸다. 한일합방 전날 광제호에 게양되어 있던 태극기를 내려 집에 보관한 신순성은 1917년 가족을 이끌고 인천에 정착했다.

그의 장남이 인천 최초 의학박사인 신태범(1912~2001)이다. 그는 8_15광복 후 열린 한국기선 취항식 당시 일본으로부터 인수받은 기선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선친이 보관하던 태극기를 걸었다. 유지를 받든 것이다.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1942년 인천 중구에 신외과의원을 개원한 이래 1979년까지 의사 활동을 했다. 서울에서 개업할 여건이 되었지만 고향이나 다름없는 인천을 택했다. 문학, 향토사학, 철학과 같은 인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광복 후 일본식 동명(洞名)을 우리나라 이름으로 바꾸는 일을 맡아 중국인들의 동네 '지나정(支那町)'을 한국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뜻을 담아 '선린동(善隣洞)'으로 바꾸고, 대한제국 시절 화폐를 만들던 전환국이 있던 곳을 '전동(錢洞)'으로 개명했다. 그는 생전 “어느 한 분야에도 성공하지 못한 반쪽 인생”이라고 말했지만, 당대의 준재였다. 수필집 '반사경', '인천 한 세기', '개항 후의 인천풍경', '먹는 재미, 사는 재미' 등 인천과 관련 있는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신태범의 아들이 조선일보 프랑스 특파원을 지내고 인천사(史)에 큰 획을 그은 신용석이다. 인천시 아시안게임유치위원장을 맡아 인천이 2014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몇 차례나 서울이나 프랑스에 정착할 갈림길에 놓이기도 했지만, 선대의 인천에 대한 애착의 영향으로 인천 사람이 되었다고 술회한다. '숙명'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신용석은 부친을 닮았는지 다방면에 식견이 탁월하다. 그와 술자리를 함께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다. 현재 인천일보에 수필_칼럼인 '지구촌'을 연재(매주 금요일)하고 있는데 943회에 달한다. 신씨 3대는 인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얽혀 있는 것 같다.

 

김학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