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면부지 낯선 이국인(異國人)들과…

일 7000평·청 4000평 약탈적 지계
구미인들 14만여평 주처로 삼아

낯선 이국인들 마음껏 터 잡아
제물포 어민들 포구서 쫓겨 내륙으로

1888년 첫 서양식 공원 '각국공원' 조성
1901년 제물포구락부 개설 친목 도모

조선인, 노란머리·파란눈 양인 충격
이국인과 갈등하며 살 운명 내몰려
▲ 제물포 사람들의 주거지와 일본지계의 대조적인 풍경이다. 이국 일본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누대에 걸쳐 조용히 살아오던 이곳 제물포 사람들은 차츰 개항장 외곽으로, 외곽으로 밀려나는 운명을 맞는다.
▲ 제물포 사람들의 주거지와 일본지계의 대조적인 풍경이다. 이국 일본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누대에 걸쳐 조용히 살아오던
이곳 제물포 사람들은 차츰 개항장 외곽으로, 외곽으로 밀려나는 운명을 맞는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 일본지계. 개항 후 저들이 건너 온 지 몇 년 사이에 일본지계는 완전히 일본의 어느 시가지처럼 변해 버렸다. 사진 중앙 왼쪽의 3층 건물이 일본인 호리 리키다로(掘力太郎)가 1888년에 신축한 서양식 호텔이다.
▲ 일본지계. 개항 후 저들이 건너 온 지 몇 년 사이에 일본지계는 완전히 일본의 어느 시가지처럼 변해 버렸다.
사진 중앙 왼쪽의 3층 건물이 일본인 호리 리키다로(掘力太郎)가 1888년에 신축한 서양식 호텔이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 청국지계, 곧 청관 거리 풍경이다. 청나라 고유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다. 이곳 지계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경동 싸리재 쪽에 새로운 지계를 설정하면서 제물포 사람들을 거주지에서 밀어내었다.
▲ 청국지계, 곧 청관 거리 풍경이다. 청나라 고유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다.
이곳 지계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경동 싸리재 쪽에 새로운 지계를 설정하면서 제물포 사람들을 거주지에서 밀어내었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인 각국지계 내의 공원 풍경. 중앙에 보이는 양관(洋館)은 1905년에 지어진 영국인 사업가 제임스 존스턴(James Johnston)의 별장이다. 지금의 자유공원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 자리에 있었는데 6·25 당시 포격을 받았다.
▲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인 각국지계 내의 공원 풍경. 중앙에 보이는 양관(洋館)은 1905년에 지어진 영국인 사업가 제임스 존스턴(James Johnston)의 별장이다.
지금의 자유공원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 자리에 있었는데 6·25 당시 포격을 받았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난폭하게 쇄국의 닫힌 문을 두드렸던 외국 세력들은 후일을 위해서라도 문서로써 개항에 따른 자기들의 권리를 담보하고자 했다. 일본은 이미 운양호 사건 이듬해인 1876년 조선과 수호조규를 맺은 터였다.

그 다음으로 조약 문서를 내민 것은 미국이었다. 이 미국과 조약을 맺은 1882년이 조선이 서방 국가와 최초로 수교한 해가 된다. 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태리, 불란서,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등이 달려와 조선과 차례로 수교했다. 1882년에서 1902년까지의 일이었다.

본격적인 조선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서, 또 타국이나 조선의 간섭을 받지 않는 지계설정, 곧 치외법권 지역의 확보를 위해 체결한 조약이나 장정(章程) 같은 것도 그 하나였다. 무력에 의한 비합리적인 개항, 그리고 호혜(互惠)가 결여된 수교조약에 이어 체결된 지계 설정 조약 역시도 일방적이고 착취적, 약탈적인 것이었다.

지계 설정의 선두 자리 역시 재빠른 일본이 차지했다. 개항 당년 9월 말에 현 중앙동, 해안동 일대 7천 평을 자신들의 지계로 설정한 것이다. 명목상이나마 종주국을 자처하던 청국은 한 발 늦은 1884년에 속칭 청관(淸館) 지역의 4천 평 부지를 지계로 마련했다. 구미인들은 현 송학동, 북성동, 송월동을 포함하는 자유공원 일대 14만여 평의 광활한 지역을 주처(住處)로 삼았다.

개항이라는 사건 자체만은 애초 제물포 사람들, 어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을지라도, 그러나 지계 설정만은 당장 살에 닿는 일이었다. 개항 당시 조선인 주거가 불과 몇 십 가구에 불과했다고는 해도, 특히 일본지계가 들어선 해안가 일대의 땅은 일인들에게 고스란히 침식되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몇 년 안에 일본지계에는 본국으로부터 한탕을 노려 건너온 약삭빠른 장사꾼들과 무식한 하층 건달들이 득시글거리게 되었고, 지계가 비좁아지자 조선인 거주 지역으로 침투해 온 것이다.

청국지계, 곧 청관 쪽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갑신정변 후 청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상인, 쿨리(苦力) 등의 이주가 급증했다. 지계설정 후 3∼4년 만에 지계 내 거주 인구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그 해결책으로 싸리재[三里寨] 일대에 새로운 조계지 확장을 들고 나온 것이다. 결국 1887년 무렵, 청국은 그곳에 있던 조선인 민가 300여 호에 대해 비용을 지급하고 용동 등지로 밀어내었다.

 

▲ 1897년 12월 23일자 독립신문 기사(붉은 선 안)이다. 제물포 거주 한 청인이 한국인이 돈 30원을 도적질을 했다며 청국지계 내 순검청에 가두었고, 그 한국인이 탈출 도중 사망하자 이에 분노한 한국인들이 불법 감금이었다며 그 청인을 구타한 끝에 한 눈을 실명케 한 사건이다. 개항 이후 제물포 사람들은 이렇게 이국인들과 갈등을 빚었다.
▲ 1897년 12월 23일자 독립신문 기사(붉은 선 안)이다. 제물포 거주 한 청인이 한국인이 돈 30원을 도적질을 했다며 청국지계 내 순검청에 가두었고, 그 한국인이 탈출 도중 사망하자 이에 분노한 한국인들이 불법 감금이었다며 그 청인을 구타한 끝에 한 눈을 실명케 한 사건이다. 개항 이후 제물포 사람들은 이렇게 이국인들과 갈등을 빚었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이렇게 일본이나 청국이 조계를 쉽게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일방적인 착취, 약탈적 지계장정 때문이었다. 지계가 비좁게 되면 언제든지 확장할 수 있다는 규정이 명문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규정에 따라 제물포의 조선인은 고요하고 잔잔했던, 그리고 대대로 어민의 삶을 이어오던 포구를 내놓고 내륙 쪽으로 속절없이 밀려나게 된 것이다.

복닥거리는 일본과 청국지계와는 달리 각국지계는 비교적 조용했다. 남쪽으로 펼쳐진 제물포항과 앞바다의 푸른 섬들을 내려다보는 우뚝한 위치의 각국지계는, 응봉산 정상을 아우르는 넓은 면적 안에서 국적 다른 몇 명 안 되는 구성원들이 비교적 여유롭게 자치제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1888년 택지 이외의 여유 부지에 공원을 꾸몄다. 이 공원은 이른바 각국공원(Public Garden)으로 불렀는데 우리나라 최초로 조성된 서양식 공원이었다. 북성동에는 묘지를 조성해 인천에 거주했던 여러 인물들을 안장했다. 이어 1901년에는 저들의 사교와 친목을 위한 장소로 제물포구락부를 개설했다. 6·25전쟁으로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들이 각국지계 내에 지었던 웅장하고 건축미 뛰어난 양식 건물들은 제물포항의 랜드 마크로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결국 개항은 제물포에 각국의 거대한 군함과, 기선들의 출입을 허락하면서 동시에 용모도, 복장도 낯선 이국인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도래(渡來)해 제 나라처럼 터를 잡고 살도록 했던 것이다. 신태범(愼兌範) 박사는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그들 낯선 도래인(渡來人)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제 척사론은 간 데 없고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이라는 낭설로 길들여졌던 양인과 싫든 좋든 간에 대면하게 된 것이다. 맨발에 게다짝을 끌고 다니는 일인과 머리를 땋아 내리고 다니는 청인에 놀란 우리는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양인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라게 된 것이다. 제물포에 가면 별의별 사람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각지의 한량들이 구경하려고 모여들었을 법도 하다.

이국인들의 등장이 놀람과 충격, 그리고 흥밋거리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들은 서양인들을 식인(食人)으로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피스(W. E. Griffis, 1843∼1928)의 『은자의 나라 한국』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은 아이를 훔쳐다가 솥에 삶아 먹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은 부인들을 잡아다가 젖가슴을 베어 간다는 보도가 해외로 퍼져 나갔다. 소가 없어지자 조선 사람들은 이제까지 그렇게 많이 사용하던 연유(煉乳)가 전적으로 사람을 원료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것은 1888년 무렵까지도 조선에 횡행하던 소문이었지만, 제물포 사람들은 이제 이런 이국인들과 함께 갈등 속에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애초 이 모든 것들이 제물포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았다. 개항이라는 사건은 실로 큰 변화를 그들에게 선물했던 것이다.

자, 이제 서설을 마무리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제물포 포구민들의 삶과 제물포항의 변모는 어떠했으며, 그것은 또 어떤 형태로 사람들의 뇌리에 투영되었는지 살펴보자.

/김윤식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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