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 압록강 하중도 아닌 요동땅으로 위치 비정
중·일 영토분쟁 대응 융합연구방법론 필요성 역설

 

“우리의 국경사는 한반도 안에서의 확장의 역사가 아니라 한반도 밖 중원에서 한반도로의 축소의 역사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의 변화뿐 아니라 명·청 교체기 동아시아의 패권을 가늠할 수 있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그래서 위화도 회군은 사극의 단골 소재였으며 '충(忠)'과 '쿠데타'를 논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화두다.

인하대 융합고고학과 허우범(사진) 박사는 논문 '여말선초의 서북 국경선 연구'에서 우리 역사서와 중국 역사서를 비교하고 직접 현지답사를 통해 위화도의 실제 위치를 비정했다. 위화도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현재 신의주와 중국 단둥 사이를 흐르는 압록강 안의 '하중도'가 아니라 강변에 위치해 있으며 장소 역시 현재의 요동땅이라는 것이다.

허우범 박사는 “연구를 통해 압록강을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이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당시 '경계'라는 의미의 보통명사, 즉 '국경선'으로 생각하고 시기별 변동사항을 고찰한 결과 위화도와 평안도 의주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면서 “이성계가 회군한 위화도는 현재의 압록강에서 요동지역으로 50㎞ 올라간 관점만족자치현 서점자 지역이며 평안도 의주는 현재의 압록강 위쪽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최영이 '한 달 이내'에 요동정벌이 가능하다고 공언했던 이유도 현장답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압록강을 어느 하나의 강중기가 아니라 발원지인 장백산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지점까지의 잇는 몇 개의 강줄기로 인식하면 고려는 건국 이후 요나라에 중원 서북지역을 내주기 시작해 점차 축소되기 시작해 조선 초기 휘발하-혼강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현재의 압록강보다는 위쪽, 즉 중원에서 우리의 역사가 펼쳐졌다고 설명한다.

그는 조선시대 400여 년간 160건이 넘는 위화도 관련 자료들을 수집·분석해 사서에 기록된 위화도의 특징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고 그 내용을 논문에 담았다. 허 연구원은 또 새롭게 밝힌 위화도 위치와 함께 고려 말 우왕과 최영이 시도한 요동 정벌과 관련된 철령위의 위치도 논문에서 설명하고 있다.

허 박사는 “우리의 국경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북으로 올라가는 한반도 안에서의 확장의 역사가 아니라 중원에서 한반도로 축소의 역사였다. 아픈 영토사라 하여도 이를 올바로 인식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사인식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면서 “중국의 동북공정사업과 일본의 독도 거론 등으로 영토분쟁에 직면에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국제적인 영토분쟁에 대응하는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국내 문헌사료에만 의존한 기존의 역사연구방법에서 탈피한 융합연구방법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오는 29일 서울 대한학술원에서 전문가 초청 공개토론회가 열릴 예정이다.

/글·사진=김칭우 기자 chingw@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