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공간 무의식 속에 은폐된 '진실'
▲ 영화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중 남자가 여인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장면.

 

“다시 한 번 나는 걸었습니다. 혼자서. 이 똑같은 복도를 따라서, 똑같이 버려진 방들을 거쳐서…”

바로크식의 크고 호화로운 호텔에서 한 남자가 복도, 살롱, 계단 등을 헤매며 자신의 애인을 애타게 찾는다.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여인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면서 작년에 둘이 사랑을 나눈 사이이며 함께 떠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려고 이곳에 왔다고 말한다.

누벨 바그의 거장 알랭 레네 감독의 영화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1961)는 누보 로망 작가 알랭 로브그리예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리얼리티 위에 구축한 '환상성'이 돋보이는 전위적인 작품으로 당시 '전대미문의 위대한 영화'라는 극찬을 받으며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한 휴양지 호텔을 배경으로 과거에 나눈 사랑을 기억하는 남자와 이를 부인하는 유부녀 사이의 엇갈린 기억을 선형적 내러티브 구조 해체, 액자식 구성, 파편적 편집, 반복되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등 실험적인 영화기법으로 그려내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통해 그려낸 인간의 무의식 세계

익명의 남자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바로크풍 음악의 선율과 함께 흐르고 카메라의 움직임이 바로크풍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천장, 벽, 복도 등을 훑고 지나간다. 영화는 호텔 내부의 현란한 이미지와 꿈꾸는 듯 연극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로 시작된다. 감독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도입하여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탐구하며 기억과 망각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 기이하고 몽환적인 호텔과 기하학적인 구조의 차가운 정원은 바로 주인공 여인의 무의식 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 둘이 나눈 사랑과 1년 전 함께 떠나기로 한 약속에 대해 그녀의 기억을 끈질기게 환기시키려고 노력하는 남자는 그녀의 무의식 속에 버려진 기억의 파편들 중 하나다. 복도, 계단, 살롱 등 호텔 공간 곳곳에서 계속되는 남자의 설득에 완고하게 부인하던 여인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한다. 급기야 하이힐 구두 굽이 부러지는 순간 갑자기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그의 말이 사실임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의 설명에 따라 기억을 재구성하던 여인은 자신의 기억과 그의 기억이 다름을 알고는 또 다시 그를 밀어낸다. 이처럼 반복되는 기억의 왜곡은 프로이트가 주장한 대로 무의식에서 작동하는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욕망, 감정 등을 검열하는 방어기제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기억의 왜곡이 거듭된 끝에 마침내 그녀는 자신이 정원의 은밀한 곳에 깊숙이 묻어버렸던 진실을 눈앞에 끄집어내어 본다. 그리곤 종소리가 울리자 자의 반 타의 반의 모호한 분위기로 남자와 함께 호텔을 떠난다. 그런데 이 때 어둠에 잠긴 호텔 외관 이미지 위로 흐르는 엔딩 내레이션에 의해 관객은 출구 없는 미궁에 빠진다. '영화 속 세계는 도대체 누구의 무의식인가?'라는 의문과 함께.

프로이트는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 너머에 인간의 욕구와 본능을 통제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있음을 세상에 알리며 서구의 전통적인 '이성중심주의'에 경종을 울렸다. 호텔 외관을 비추는 물그림자처럼, 그리고 호텔 내부를 비추는 거울처럼 무의식은 은폐된 진실을 비춘다. 똑바른 선, 엄격한 공간, 신비함이라곤 전혀 없는 직선의 길을 따라 우리는 이제 길을 잃어버렸다. 영원히, 깊은 밤에…

 

/시희(SIHI) 베이징필름아카데미 영화연출 전공 석사 졸업·영화에세이스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