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28. 경기도 북부지방 의병장 김연성(하)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28. 경기도 북부지방 의병장 김연성(하)
  • 인천일보
  • 승인 2020.07.26 20:31
  • 수정 2020.08.04 11:48
  • 2020.07.27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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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서 순국한 김인성으로 오인…최후, 여전히 베일 속

13도창의진 대장 직할대 참모 역할
일본군 공격에 잠시 이강년 의진 참여
작전 중지 이후 임진강 유역으로 이동
허위 총대장으로 서울진공 도모했으나
호응 적어 실패…은거하던 허위도 붙잡혀
권중설 중심 창의군수부 참모장 활동
의병장 대신 직접 부대 이끌고 전선서 활약
1909년 1월7일 축산리헌병분견소 습격도
통감부 기밀통발 1909년 교형 순국 기술
황해도 토산 출신 다른 의병장 관련 내용
피체 기록·판결문 미발견…향후 과제로

 

 

 

▲ 김연성·이은찬·윤인순 의진 300여명이 일본군 헌병분견소 습격 건(<폭도에 관한 편책>. 1909. 1. 15.).
▲ 김연성·이은찬·윤인순 의진 300여명이 일본군 헌병분견소 습격 건(<폭도에 관한 편책>. 1909. 1. 15.).

 

◆ 서울진공 전개 후 임진강 유역으로

13도창의진의 서울진공 당시의 모습을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서울진공을 위해) 모인 사람 1만여 명은 장차 서울로 진군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협약(脅約:을사늑약)을 격소(繳消: 繳銷:흔적을 없앰)하여 국권을 회복(恢復)하고자 하였다. (이인영은) 먼저 심복(전 감찰 김세영 金世榮)으로 하여금 서울로 잠입시켜 각국 영사관을 방문하여 (의병을 일으킨) 사유를 진술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군사(軍師:허위)는 군려(軍旅:군대, 13도창의대진)를 정돈하여 진발을 준비하였다. 이에 이인영은 각도의 의려(義旅:의진)에 일제히 진군할 것을 재촉하고, 스스로 300인을 인솔하여 동대문 밖 30리에 이르렀으나 각 의진은 이르지 못하였다. 일본군이 먼저 공격하니 분전하였으나 적의 저항에 퇴군하였다.(필자 역)” (송상도, <기려수필>. 127쪽)

본래 13도창의진의 계획은 동대문 밖에서 전군이 집결하여 대오를 정돈한 후 음력 정월을 기하여 일제히 서울로 진격할 예정이었는데, 양주로 오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1908년 1월25일 접전이 13번째였는데,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기려수필>에는 '군사들이 지쳤고, 총탄이 고갈된 상태였는데, 1월28일(음력 12월25일) 부친의 부음을 전해들은 13도창의진 대장 이인영(李麟榮)은 군사장 허위(許蔿)에게 서울진공에 참여했던 48개 의진에 이를 중지할 것을 통보하게 하고 문경으로 향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기술하였다.

김연성 의병장은 이인영 직할부대장 권중설(權重卨)의 참모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서울진공 중지 명령에 따라 의진을 수습하는 사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잠시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합류했다. 이강년 의진은 강원도 북동쪽 함경남도 접경지역으로 향하자, 김연성 의병장은 의진을 이끌고 임진강 유역으로 향하였다.

▲ 김연성 의진 활약지 감악산 일대.
▲ 김연성 의진 활약지 감악산 일대.

 

◆ 허위 의병장 도와 2차 서울진공 꾀하다

임진강 유역으로 돌아온 의진은 권중설 의진 외에도 권준(權俊)·김수민(金秀敏)·김진묵(金溱默)·왕회종(王會鍾)·이은찬(李殷瓚)·조인환(曺仁煥) 의병장이 이끈 의진 등이었다. 이들은 허위를 총대장으로 삼아 의진을 재정비하여 다시 서울진공을 도모하기 위해 군율(軍律)을 정하고, 군표(軍票)를 발행하였으며, 군사를 훈련하고, 군기(軍器)를 제조하게 하였다. 지방민에게 납세를 명하고, 미곡 반출을 중지할 것을 호소하여 군량 확보를 도모하면서 1908년 4월에 13도의 의진에 통문을 내어 결속을 공고히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호응이 적어 종전의 13도창의진 형태를 이루지 못했고, 점차 각 의진은 독자적으로 활동하게 되어 허위 의병장은 권중설·김연성 의진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은거 생활을 하다가 피체되기에 이르렀다.

“경기도 영평군 서면 유동(柳洞)에서 헌병이 적괴(賊魁:의병장-필자 주) 허위(許蔿)를 체포하였다.

적괴 허위가 영평군 서면 부근에 잠복하였음을 탐지한 경성헌병분대 철원분견소 오타(大田) 헌병대위 이하 헌병 7명과 동 분대 축산리분견소 헌병 5명은 동 방면 수색의 결과 6월 11일 오전 7시 영평군 서면 유동(연천 동 약 30리) 거주 박정연(朴政淵) 집에 잠복하고 있음을 확지하고 오타 대위 일행이 선착하여 동가를 포위하고 드디어 허위를 체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를 경성으로 호송하여 지난 17일 오후 10시 20분 경성에 도착, 목하 취조 중”(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1권. 196쪽)

허위 의병장은 본래 유학자 출신인 데다가 당시로서는 고령인 55세였다. 처음부터 홀몸으로 의진을 찾아가서 왕회종·김진묵 의진의 의병장으로, 김수민 의진의 참모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며, 이인영·이은찬과 더불어 13도창의진 방략을 논의한 끝에 이를 성사시켰던 인물이었다.

▲ 김인성(金麟聖) 사형집행 통보 문서(<통감부래안> 제1권. '기밀통발 제124호'. 1910. 1. 22.).
▲ 김인성(金麟聖) 사형집행 통보 문서(<통감부래안> 제1권. '기밀통발 제124호'. 1910. 1. 22.).

 

◆ 창의군수부 참모장으로 활약하다

허위 의병장이 피체되자 권중설 의병장은 의진을 수습하여 의진의 이름을 창의군수부(倡義軍帥府)라고 하고, 김연성 의병장은 그 의진의 참모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권 의병장은 전선에 나가지 않고 지휘한 반면, 김 의병장이 직접 의진을 이끌고 전선을 누볐다.

“1. 이달 3일 오후 4시경 양주군 이담면 안흥리(安興里) 북방 삼림 중에 폭도(의병-필자 주) 약 6, 70명이 집합하여 동 6시 동면 하 봉암리(鳳岩里)에 이르러 토인(土人)에게 명하여 석식을 계(喫)하고 동 8시 연천 방면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2. 이달 4일 오후 6시경 폭도 약 100명이 어등산면(於等山面) 방향으로부터 와서 천천면 덕정리(德亭里), 묵은면을 향하여 통과하였다 한다.

3. 이담면 축산리(杻山里) 적괴(의병장-필자 주) 전 박사(博士) 김연성(金演性)은 월일 미상 미국으로 도항한 바를 토인 간에 풍평(風評)하고 있었다.

4. 토인의 말에 의하면 지금 이곳 부근을 배회하는 폭도는 총수 약 300명으로 무기는 30년 보병총 및 기총(騎銃) 약 7, 8정, 엽총 약 30정, 화승총 약 15정, 기타 한병용(韓兵用) 단발총을 휴대하였다 한다. 폭도의 일부는 무기를 산중에 은닉하고 토벌대 및 헌병의 시선을 교묘히 피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 같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0권. 125~126쪽)

이 기밀문서는 1908년 4월6일 축산리헌병분견소장 이마쿠레(今給黎) 오장이 경성헌병분대장 야쿠시가와(藥師川) 소좌에게 보고한 내용인데, 이를 통하여 김연성 의진은 규모가 컸고, 화승총 중심의 여느 의진과는 달리 상당한 수준의 총기류로 무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연성 의병장이 “미국으로 도항” 운운한 것은 이후 그의 활동으로 볼 때 헛소문에 불과한 것이었다.

1908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일본군경의 가혹한 의병 진압에 대항하여 격전을 벌인 탓에 의진에서는 많은 의병이 살상되고, 탄환마저 부족한 상태가 되어 전투력이 약화되었는데, 김연성 의진은 창의원수부 의진과 함께 활동하였다.

특히 1909년 1월7일 이은찬·윤인순·김훈(金薰) 의진과 연합하여 축산리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2시간 동안 격전을 벌였고, 창의원수부 좌군장 정용대 의진과 함께 양주군 4개면에 군수금 징발을 위한 고시문을 발송하였다는 것이 일제의 기밀문서에 드러나고 있다.

“폭도수령(의병장-필자 주) 김연성·정용대

위 두 사람의 이름으로 2~3일 전 양주군 이담면·어등산면·천천면·고주내면 4개면에 대요 아래와 같은 고시를 발했다고 한다.

'근래 우리가 일본 군대와 자주 교전하여 이 때문에 탄약이 결핍되고 또 군자금을 소비했다. 그러므로 각 면장은 매호로부터 금 30전을 징수하여 오는 20일까지 우리 의군에게 가져와야 하며, 만약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군법에 따라 처분한다.' 운운하였다.“ (<통감부문서> 6권. 1909. 3. 15.)

창의군수부를 이끌고 있던 권중설 의병장은 '창의군수부대리'라는 이름으로, 종전의 창의원수부 좌군장 정용대 의병장은 창의군수부 돌격장이라는 이름으로 각국 영사에게 통고문을 보낸 것이 <통감부문서> 10권 '헌기 제1088호'(1909. 5. 25.)에 나타나 있다.

원문은 1909년 3월로 되어 있는데, 대한매일신보에는 '군사부장 통문'이란 제목으로 간략한 기사가 실렸다.

“군사부장 통문

한국 13도군사부장 권중설 씨가 지금 의병을 많이 교련하며 각 군 의병진에 통문하되, 병기와 탄약을 일제히 정리한다 하고 각처에 은복한 의병들을 모아 창기한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09. 4. 6.)

▲ 의병장 송천 김연성 열사 추모비(경기도 동두천시 안흥동 산70).
▲ 의병장 송천 김연성 열사 추모비(경기도 동두천시 안흥동 산70).

 

◆ 김연성 의병장은 교수형으로 순국했나?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에는 “김연성은 체포되어 1909년 11월 29일 평양공소원에서 교형(絞刑)을 받아 순국하였다.”라고 기술했는데, 그 근거로 <통감부래안(統監府來案)> 제1권. '기밀통발(機密統發) 제124호'(1910. 1. 22.)를 제시하였다. 과연 그러한가?

“기밀통발 제124호

황해도 토산군 숙인면(宿仁面) 구석리(九石里)

강도 및 모살범(謀殺犯)

김인성(金麟聖). 29세

우(右) 자는 폭도(暴徒)의 무리에 들어가서 폭도수괴(暴徒首魁) 이종협(李鍾協)의 부하 이학조(李學祚)와 공모하고,… 형법대전 제593조 전단 제1호, 제473조 전단, 제129조에 의하여 평양공소원에서 명치 42년 11월 29일 피고를 교형(絞刑)에 처할 바로 판결하고,…

명치 43년 1월 22일

통감 자작 소네 아라스케(曾 荒助)

태자소사(太子少師)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각하” (이태룡 역주, <통감부래안>. 30~31쪽)

'기밀통발 제124호'는 황해도 토산 출신 김인성(金麟聖) 의병장에 관한 것이다.

김연성 의병장은 이은찬 의병장이 1909년 3월31일 피체될 무렵에는 의병투쟁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약 3년 동안 함께했던 권중설 의병장이 1910년 3월13일 피체될 당시 그에 대한 이렇다 할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김연성 의병장에 대한 피체 기록이나 판결문은 왜 발견되지 않고 있는가? 이것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이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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