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차를 고치기 위해 단골 카센터를 찾았는데 주인의 표정이 무척 어둡다. 카센터 기사가 이유를 설명했다. 주인이 J그룹의 다단계 사기에 걸려 3억4000만원을 날렸다고 한다. 기사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주인이 막바지에 카센터를 팔아 4억원을 베팅하려 했는데 팔리지 않는 바람에 무산됐다는 것이다. 기사는 “가게가 팔렸으면 주인은 한강으로 가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카센터 사무실은 다단계 판매하는 사람들의 집합소였다고 한다. 기사는 “잘나갈 때는 그랜저를 타고 오더니 요즘은 티코로 바뀌었다”며 웃었다. 그들 중 일부는 감옥에 간 회사대표를 아직도 신처럼 떠받든다며 혀를 찬다. 순간 유사한 다단계 수법에 빠져 2000만원을 날린 지인이 생각났다. 영관급 장교인 그는 자신이 끌어들여 더 큰 피해를 본 상관 때문에 괴로워했다. 지인이나 카센터 주인 모두 꼼꼼한 사람인데도 당했다. 우리나라 사기꾼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하지 않는가.

코로나와 관련해 다단계 판매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제기됐다. 최근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저는 코로나 확진자의 가족입니다. 다단계업체 폐지를 간절히 부탁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다단계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피해는 남은 가족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고 밝혔다. 청원인의 부친은 인천 남동구에 있는 가정집에서 열린 다단계식 건강기능식품 설명회에 참석했다가 코로나에 감염됐다. 경기도 과천의 코로나 환자가 개최한 설명회였다.

청원인의 글에는 코로나 감염보다 다단계에 대한 원망이 더 묻어나온다. 그는 “아버지는 다단계 때문에 재산피해를 입고 코로나 확진까지 돼 이제 남은 게 없는 상태”라며 “제2의 인생을 살게 해주겠다거나 돈이 무조건 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식의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끌어모아 정작 맨 윗사람만 수익을 창출하고 그 밑 사원들로 돌려막는 상황만 초래하는 다단계업체를 폐업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이어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피해를 주는 다단계업종 종사자분들은 신천지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글이 공론화되어 다단계가 한 가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다단계 판매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난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정부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고, 대형 다단계 사기사건이 터졌을 때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식으로 대처해 왔다. 그래서인지 다단계는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며 여전히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청원인의 절규가 왜 나왔는지 정부는 면밀하게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김학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