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민주정부가 출범되면서 모든 분야의 개혁이 극히 건전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는 시점에 즈음하여 심사숙고한 끝에 본인이 설립해 성장되어 온 학교법인 선인학원이 설립자인 본인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인천지역의 고질적인 분쟁요인으로 남아 있어서는 아니되겠다는 생각에서 선인학원을 인천직할시에 기증하고자 합니다.”-1993년 6월 학교법인 선인학원 설립자 백인엽.

선인학원을 인천시에 내놓겠다는 다짐이다. 백인엽씨는 93년 6월9일 “선인학원이 시립화 또는 공립화하는 조건으로 학원재산을 인천시에 기증한다”는 내용의 증서를 제출했다. 고(故) 최기선 시장 때 일이다. 최 시장은 다음 날 기자회견을 열고 “시민과 시의회, 학교의 의견을 수렴해 시립화와 공립화를 신속하고 책임 있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선인학원 산하 인천대와 인천전문대의 시립화, 중·고교의 공립화 발판을 마련했다. 이윽고 이듬해 3월1일 30여년 간 인천 지역사회에 파행과 분규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선인학원 내 14개 학교가 한꺼번에 시립대학과 공립 중·고교로 탈바꿈했다. 인천을 넘어 우리 교육사에 길이 남을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 셈이다.

선인학원의 경우 육군 장성이던 백인엽(1923∼2013년)씨가 1958년 '성광학원'을 인수한 뒤 65년 3월 학교법인 명칭을 바꾸면서 출발했다. 선인학원은 형 백선엽의 선(善)자와 자신의 인(仁)자를 합쳐 지었다. 선인중·고와 인화여중·고, 선화여중·고는 그렇게 태어났다. 다른 학교도 가족 이름에서 따다 붙였다. 선엽씨 호인 운산을 비롯해 인엽씨 호인 운봉, 어머니 이름 효열 등을 교명으로 채택했다.

선인학원은 출범 이후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국내 사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양적 팽창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 이면엔 갖가지 파행과 비위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군사정권 비호 아래 상상을 초월한 선인학원의 '비리 백태'는 지역사회에서 아주 유명했다. '선인왕국'에서 백인엽씨가 저지른 갖가지 횡포는 학교 구성원 반발 확산과 시민사회 투쟁 등으로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당시로선 사학전횡을 극복하고, 우리 교육사에 큰 획을 그은 사례로 꼽혔다.

왜 선인학원을 다시 떠올리는가. 과거 선인학원 설립에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진 백선엽 장군이 지난 10일 100세를 일기로 별세해 15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면서다. 앞서 보듯 백 장군과 인천과의 인연은 인엽씨와 함께 아주 깊다. 그런데 백 장군은 일제 강점기 간도특설대 장교로 임관해 독립군 토벌에 가담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반면 한국전쟁 때 낙동강 전투와 38선 돌파 등에서 결정적 수훈을 세웠다는 칭송도 듣는다. 그래서 아직도 그의 묘역을 놓고 시끌시끌하다. '6·25 전쟁영웅'과 '친일파'란 엇갈린 평가를 받는 백선엽. 훗날 역사는 그에 대해 어떻게 기술할까.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