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자들에게 숙박과 식사를 제공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다. 유명 배우들이 직접 장을 봐서 손수 요리하고 순례자들에게 소중한 추억과 선물이 될 식사를 대접하는 내용으로, 한국사람이면 타지에서 오래간만에 먹어보는 한식에 감동하고 외국인들은 낯설지만 정감 있는 음식에 고마워하는 내용을 담은 프로그램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신앙심을 기본으로 하는 연간 수천의 순례자들이 예전부터 찾던 옛길에 불과했다. 이 길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건 80여개 국에 6000만 부가 팔려나간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 덕분이었다. 책 속에는 파울로 코엘료가 직접 몇 백 킬로미터의 '산티아고의 길'을 순례하며 겪은 체험과 영적 탐색이 가감 없이 담겨 있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순례길을 걷게 된 사연도 여러가지였다. 현실 도피, 은퇴 후 새로운 도전 정신을 가지고, 혹은 이직을 앞두고 사람들은 뙤약볕 아래서 수백 킬로미터를 걷는 동안 잃어버린 자신과 신(神)을 재발견한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쏟아지는 경험을 한다.

2000년대 들어 웰빙 생활과 함께 걷기 열풍이 불었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가 개막되면서 사람들은 느끼고 생각하는 재미에 몸도 건강해지는 걷기를 원했다.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이 그 대표격이다.

사람들은 그 옛길들을 걸으면서 선조의 체취를 맡고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끼고, 건강도 도모하게 된 것이다. 테마가 있는 걷기가 인기를 끌게 되자 산림청과 환경부, 문화관광부, 각 지자체의 산림 관리 주체들은 너도나도 숲길과 생태체험 길 조성에 들어갔다.

인천시의 둘레길도 이즈음 조성됐다. 한남정맥 녹지축을 따라 종주길 10코스 60㎞와 주변의 산자락과 도심을 연결하는 둘레길 16코스 141㎞이다. 산과 들, 하천과 갯벌, 바다와 섬을 잇고, 신시가지와 구도심을 연결하는 등 인천의 특색을 살려 조성된 자연과 문화가 함께하는 인천의 둘레길과 종주길에 대한 자부심은 시민이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계양산의 '계양'이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든지, 천마산의 천마와 아기장수 이야기, 원적산을 지나 만월산과 도심지 내 자연이 아직도 살아 있는 도룡뇽마을, 일제강점기 소금과 눈물을 실어 나르던 수인선의 슬픈 역사와 비류가 미추홀을 세운 문학산의 전설, 배다리 헌책방 골목과 백범 선생의 삶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인천감리서 터, 피난민과 노동자의 삶이 배어있는 만석동의 골목골목 그리고 우리 역사의 각 시대마다 빠지지 않는 강화도, 바닷길과 산길 외에도 섬에서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길, 갯티길이 있는 장봉도에 이르기까지 보석같은 이야기가 우리의 둘레길과 종주길에 얽혀 있다.

잠시 주춤하던 코로나19가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재확산 양상을 보이며 좀처럼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지역사회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사람들 간의 거리를 유지하자는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이 '생활 속 거리두기'로 바뀌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일상의 변화는 사람들의 생각과 정서까지 모두 바꾸고 있다.

서로 모여서 얼굴을 맞대고 '지지고 볶고' 지내야 정이 생긴다는 말은 큰일 낼 말이다. 요즘은 '언택트' 시대이다. 이는 부정 접두사 '언(un)'과 접촉을 뜻하는 '콘택트(contact)'가 합쳐서 생긴 말로, 비대면·비접촉 방식을 나타낸다. 물리적 접촉을 최소화하는 지금 시대의 핵심적인 개념이 됐다.

부쩍 늘어난 혼자만의 시간을 이용해 '인천의 둘레길과 종주길'로 걷기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그냥 걸어도 좋지만, 길에 얽힌 역사와 문화를 알고 걷는다면 길을 걷는 재미도 커지고 길을 걷는 자체가 소중한 체험이 될 것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약을 써서 몸을 보호하는 약보(藥補)보다 좋은 음식으로 원기를 보충하는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는 걷는 행보(行補)가 낫다'라는 기록이 있다.

모든 것이 움츠러드는 요즘 두 다리만으로 할 수 있는, 유지비는 '0'인 최고의 운동이자 여가활동인 '걷기'로 지금 상황을 건강하게 극복할 활기를 찾아보자.

 

 

권혁철 인천시 주택녹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