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950년 무더운 8월, 국군1사단은 경북 칠곡군 다부동(多富洞)에서 인민군 3_13_15사단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요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6_25 전쟁. 불과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했고,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뚫기 위해 대구 축선을 공격했다. 그 중심이 대구에서 불과 20km 떨어진, 유학산(839m)과 팔공산(1193m) 사이 큰 골짜기 다부동이다. 이곳이 무너지면 바로 대구와 부산까지 적군에게 내어 줄 조국의 명운이 달린 일촉측발의 상황, 29세의 1사단장은 굶고 지친 병사들에게 “내가 선두에 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고 외치고는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세계 전쟁사에 전무후무한 '사단장 돌격', 백선엽(白善燁) 장군의 전설 같은 실화이다. 위 전투의 결사항전은 전세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적군은 기세가 꺾였고 아군은 낙동강 전선을 지켜냄으로써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다부동 전적지 기념관에 세워진 조지훈의 '다부원에서' 시비는 이렇게 증언한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일찌기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1950년 9월28일 서울이 탈환되고, 10월1일 국군은 38선을 돌파했다. 10월19일 백 장군이 이끄는 트럭 100대의 국군1사단은 트럭 1000대의 연합군보다 평양에 먼저 입성했다. 백 장군은 이 순간을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추억했다.

이후 중공군과의 운산 전투, 서울 재탈환, 휴전회담의 한국군 대표, 지리산의 빨치산 근절까지 전선에서 숱한 생사의 고비를 겪었던 백 장군은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최초 대장, 최초 야전사령관이 되어 국군 현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2020년 7월10일 백 장군이 향년 100세로 서거했다. 생전에 그를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했던 미군은 주한미군사령관 명의 성명서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워할 영웅이자 국가의 보물”이라고 애도했다. 대한민국의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조화를 보냈고, 여당은 공식논평 한 줄 내지 않았다.

그리고 7월15일, 그분의 장례가 '서울현충원'이 아닌 '대전현충원'에서, '국가장'이 아닌 '육군장'으로 치뤄진다고 한다. 이건 아니다! 대한민국은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온몸을 바쳐 지켜낸 노병을 이렇게 예우해서는 안된다.

먼저, 장례 의전을 보자. 국가장(國家葬)은 <국가장법>에 따라,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 서거한 경우' 행정안전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의 심의를 마친 후 대통령이 결정해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주관하는 반면, 육군장(陸軍葬)은 <군예식령>에 근거해 육군이 사망한 경우 애도와 재직 중의 봉사와 희생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이 결정해 주관한다. 백 장군은, 육군으로서 봉사와 희생에 대한 경의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자유민주국가로 지켜낸 현저한 공훈이 있는 자로, 대통령은 <국가장법>의 취지가 그러하듯 국가장으로 경건하고 엄숙하게 집행함으로써 국민 통합에 이바지해야 한다.

다음으로, 장지를 보자.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 모두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국립묘지이지만, 서울현충원에 모시는 것은 그 상징적 의미가 크다.

현재 서울현충원은 장군묘역 자리는 포화이나, 국가유공자 묘역은 남아 있다. 연혁적으로 서울현충원은 1955년 6_25 전쟁 희생 장병을 모시고자 만든 묘지로, 6_25 전쟁 중 전사한 11만 호국 영령들이 영면해 있어, 백 장군과 함께했던 많은 전우들이 지하에서 백 장군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청년이 광복 전 1943년 독립군과 전투한 적도 없는 간도특설대에 잠시 근무했던 이력이 이후 그의 나라를 구한 현저한 공훈을 가릴 수는 없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질 뿐이다.” 맥아더 장군의 어록이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대한민국은, 노병을 어떻게 예우한 나라로 역사에 기억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