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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26. 경기도 북부지방 의병장 왕회종(하)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26. 경기도 북부지방 의병장 왕회종(하)
  • 인천일보
  • 승인 2020.07.12 18:09
  • 수정 2020.07.31 09:15
  • 2020.07.13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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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의정부 참찬 허위 초빙…의진 규모 확대에 영향
1907년 9월 양주·적성 일대서 5차례 대규모 교전
하순 철원으로 이동…일제, 경유지 촌락 소각 만행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서울진공작전에 참여
작전 재개 좌절·허위 피체 이후 독자적 의진 활동
경술국치 무렵 망명…청년 교육에 앞장서다 서거
▲ 왕회종 의병장의 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 왕회종 의병장의 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500 의진 이끈 초심, 간도서 눈감는 날까지 이어가

◆ 500~1000명 대규모 의진 형성하다

왕회종 의병장은 전기의병(1894~1896년) 때 나타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는 1879년생이기 때문에 그때는 소년이었다. 18세 때부터 서당을 운영하다가 27세인 1905년 4월 숭릉 참봉에 이어 1907년 3월에는 숭의전 참봉으로 제수되었으나 이를 받지 않고 의병을 일으켰을 때 약 500명의 의진을 형성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전기의병장 출신에 못지않은 큰 호응이 따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왕회종은 의병장 김진묵(金溱 )과 더불어 약 5백 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평강·신계 등지를 거점으로 각 방면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여 승리를 거두고 금성·토산에서도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1권. 583쪽)

왕회종 의병장과 함께 의병활동을 벌인 김진묵 의병장은 어떤 분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평북 창성 출신으로 1905년 3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경무청 감옥서에서 근무한 바 있던 의사(醫師, 6품)였고, 이어 1906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평북 종두사무위원(種痘事務委員)으로 천연두 예방접종 담당이었는데, 그가 왕회종 의진에 가담하게 된 사유가 명백하게 드러난 곳은 없다.

▲ 왕회종, 숭의전 참봉 의원면직에 관한 대한매일신보 기사. (1907. 03. 12.)
▲ 왕회종, 숭의전 참봉 의원면직에 관한 대한매일신보 기사. (1907. 03. 12.)

◆ 전 의정부 참찬 허위를 초빙하다

참봉 출신 왕회종, 의사 출신 김진묵은 많은 의병을 모집한 후 의진을 이끌 명망가를 찾던 중, 의병장으로 추대된 이가 전 의정부 참찬 허위(許蔿)였다. 그는 벼슬을 던지고 홀몸으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의진을 찾아 나섰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의진으로 모시게 된 것이 허위 의병장 판결문 속에 나타나 있다.

“피고는 전 의정부 참찬인데, 현정부의 시정에 불만을 품고서 내란을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고 정사를 변경하려고 기도하던 때 마침 같은 목적으로 이미 내란을 일으키고 경기도 삭녕군에 집결하여 진을 친 김진묵·왕회종 등에게서 초빙하여 맞이하는 것을 기회로 융희 원년 음력 8월 그들의 진으로 갔으며…. 융희 2년 5월까지 삭녕·양주·장단·철원·춘천·토산 등의 군내에서 십 수회 토벌군과 교전하다가 마침내 동년 5월14일 영평군에서 체포된 자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권. 450~451쪽)

비록 허위 의병장이 고령이고, 직접 전투에 참전하지 않더라도 의병들에게는 매우 큰 힘이 되기에는 충분한 것이기에 그를 초빙하게 된 것이었다. 이는 일본 조선주둔군사령부가 간행한 이른바 <조선폭도토벌지>(1913) 속에 등장하는 왕회종 의병장의 규모나 그 활약상이 대단했던 것은 허위 의병장이 의진에 포진했던 것이 큰 몫을 차지할 것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는 <조선폭도토벌지>에 1907년 9월부터 12월까지 의병장과 의병 규모, 일본군 등에 관한 내용을 <독립운동사자료집> 3집 665~666쪽에 걸쳐 실었는데, 필자가 이를 편집해 보았다.

 

왕회종·김진묵 의진을 비롯한 권준(權俊)·조인환(曺仁煥) 의진의 규모는 전체 1000여명이었는데, 일제의 기록을 옮기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의병의 수효가 많더라도 주무기는 화승총이었고, 산포수의 엽총, 해산군인이 소지한 군총이나 양총은 매우 적었는데 비해 신식무기를 소지한 일본군의 규모는 대단해서 마치 한국 정규군과 전쟁하는 것처럼 준비했던 것이다.

 

◆ 1907년 9월, 5차례 일본군과 접전

1907년 7월19일 광무황제가 퇴위되고, 7월24일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어 30일 의병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전국 각지의 읍성과 산성 등 성벽을 허무는 '성벽처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31일에는 군대해산 조서가 내려졌다.

▲ 왕회종 의진 김참봉(일명 응봉) 총살 순국 문서. (<폭도에 관한 편책>. 1910. 04. 25.)
▲ 왕회종 의진 김참봉(일명 응봉) 총살 순국 문서. (<폭도에 관한 편책>. 1910. 04. 25.)

일제가 종전의 경무서(경찰서)를 접수하는 시기가 1907년 10월에야 완료되어 그 이전의 의병 진압 기록은 <폭도에 관한 편책>이 아닌, 이른바 <조선폭도토벌지>에 나타나 있다.

따라서 왕회종·김진묵 의병장의 활약상은 매우 간결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9월 한 달 동안 5차례 비교적 대규모 접전이 전개되었다.

“적성에 있었던 폭도의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 왕희종과 김진묵은 (1907년 9월-필자 주) 11일부터 13일에 걸쳐 적성·삭녕·안협·토산 등 각 지방을 약탈하고 장정을 모집 그 수는 400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임진강 유역 일대의 땅 및 경원가도 김화 부근은 특히 배일사상이 강렬하여 주민의 대부분은 폭도(暴徒:의병-필자 주)에 가담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재 평양 보병 제52연대 제4중대장 우에다(上田) 대위는 부하 1소대를 인솔하고 평양에서 기차 편으로 금천에 하차하여 구화장을 경유, 토산으로 향하고, 또 동 중대에서 신계에 파견하였던 나카무라(中村) 소대에 명하여 시변리를 경유 토산으로 나아가 우에다 부대와 책응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

우에다 대위가 인솔하는 1소대 및 나카무라 소대는 도중 아무런 소득 없이 25일 토산에 도착하였다. 중촌 소대는 19일 시변리에서 폭도 약 60명을 공격하여 그를 토산 방면으로 궤주시키고 20일 중대와 합류 21일 밤 중대는 안협을 야습하였으나 이미 폭도의 대부분은 철원 방면으로 도주한 후였으므로 아무 소득 없이 25일 각기 수비지로 귀환하였다.

재 경성 보병 제50연대 제7중대는 금성 수비를 위하여 21일 경성을 떠나 양주·적성을 거쳐 부근의 폭도를 소탕하면서 23일 토산에서 숙영하였다. 그 때 안협에 있던 폭도 약 2백 명은 그 후 철원을 습격, 우리 우편 사무원을 참살하였다는 보고에 접하고 24일 철원을 향하여 전진 중 석교(石橋) 서방에서 폭도 약 1백 명과 조우 그 14명을 사살하고 또 석교 촌민이 전부 폭도의 편임을 알고 그 촌락을 소각하여 버렸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권. 701쪽)

마치 '의병사냥'에 나선 것처럼 마을을 마구 습격하고, 주민이 의병 편이라고 단정하여 마을을 불태우는 짓을 예사롭게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본군은 9월24일 오후에는 철원 마갈지(馬乫地) 부근의 의병들을 총살하고, 25일 오전 철원에 이르렀지만 의병들의 그림자를 볼 수 없었다.

“김화 수비 보병 제51연대 제6중대는 수비 교대를 위하여 새로 파견된 보병 제50연대 제6중대의 1소대와 협력하여 철원 부근 폭도 토벌을 목적으로 25일 김화를 떠났다. 일몰 후 철원에 도착 시라이(白井) 중대와 합류하여 그날 밤 폭도 약 800명이 철원 남방 약 3리(우리식 30리-필자 주) 지점인 심원사(深源寺)에 집합하고 있는 것을 정찰하고, 시라이 중대와 협력하여 26일 야반부터 행동을 개시 각 방면에서 심원사를 포위하는 등 전진하였다.

니시카와(西川) 중대는 27일 오전 3시 법화동(法化洞)에서 약 150명의 폭도와 충돌하여 그중 20을 사살하고 궤주시키고, 오전 5시에 심원사에 도착하였으나 폭도는 약 1시간 전 이미 도주하고 없었다. 시라이 중대와 아베(阿部) 소대는 다 같이 폭도와 조우하지 않고 전후하여 심원사에 도착, 다시 철원을 향하여 귀환하는 도중 오후 3시 대광리(大光里) 동북방에서 약 250명의 폭도와 충돌하여 그중 80명은 사살하고 잔여는 산곡(山谷)으로 궤주시켰다. 28일 각대는 그 수비지로 귀환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702쪽)

이후 10월에 의병의 본거지 심원사(深源寺)를 불태웠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의 심원사는 국토 분단 상황이라 인근 지역에 복원한 것이다.

▲ 허위 의병장 판결문. 이 판결문에는 허위 의병장이 김진묵·왕회종 의진에 초빙되어 왔다고 하였다.
▲ 허위 의병장 판결문. 이 판결문에는 허위 의병장이 김진묵·왕회종 의진에 초빙되어 왔다고 하였다.

◆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고, 경술국치 무렵 간도로 향하다

13도창의진을 구성하여 1907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전개했던 서울진공작전은 추위와 군수품 부족 속에 13차례 시도하였다. 1908년 1월25일 13차 서울진공작전은 일본군의 철통 방어를 뚫지 못한 채 의진을 수습하였는데, 사흘 뒤 28일 13도창의진 대장 이인영(李麟榮)의 부친 부음이 전해지자 이인영은 군사장 허위에게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한 48개 의진에 서울진공을 중지할 것을 통지하게 하고 고향으로 향했다.

왕회종 의병장은 허위 의병장과 함께 임진강 유역으로 돌아와서 서울진공을 다시 시도하고자 통문을 내었으나 호응이 적었다. 얼마 후 허위 의병장이 피체되었다가 1908년 10월21일 경성감옥에서 순국하게 되었고, 연합의진은 다시 독자적인 의진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경술국치 무렵 간도로 망명하여 의병활동 중에 입은 부상으로 신음하면서도 광복을 위한 청년교육에 힘쓰다가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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