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이 군대 첫휴가를 나와서다. 1970년대 서울 옥수동은 산비탈 달동네였다. 그 곳 친구집을 찾았다가 여동생이 가꿨다는 손바닥만한 꽃밭에서 그 노래를 같이 들었다. '잊지는 말아야지', 이미 한참 전에 히트한 노래라고 했다. 내무반의 최말단 졸병으로서는 바깥 세상에서 무슨 노래가 뜨고 지는지도 몰랐던 때다. 애잔한 감성의 멜로디가 설움 많은 육군 일등병의 심금을 흔들어 놓았다. 인천이 배출한 가수 백영규 이야기다.

▶15년여 전 인천에 발령받아 오면서 처음 그를 만나게 됐다. 소래포구의 선술집들과 잘 어울리는 감성파 술꾼이었다. 차수가 거듭돼도 흔들림 없이 술잔을 건넨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정담을 나누다가도 화제가 '문화에 대한 몰이해'에 이르면 열변이다. 아는 이들만 알지만 1970~80년대 그는 수퍼스타급 가수였다. 한 때는 조용필보다 계약금이 높았다는 얘기도 어느 술자리에서 들었다. 1980년대 초 그의 노래를 영화화 한 '슬픈 계절에 만나요'에 출연해서는 배우 장미희와 호흡을 맞췄다. 경기도 양평산이지만 유년기에 인천으로 와 동산중_고교에서 잔뼈가 굵었다. 노래를 하면서도 외대 이태리어과를 나왔지만 이태리어는 할 줄 모른다.

▶왕년의 톱가수라도 세월의 뒤안으로 점차 잊혀져 간다. 전성기가 떠나가는 스트레스 등으로 후속 작업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다. 처음 그를 보러 갈 때도 '흘러간 가수'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감성이 녹슬지 않도록 부단히 단련하는 엄격한 가객(哥客)이었다. 경인방송의 음악프로 '백영규의 가고 싶은 마을'을 13년간 진행했다. 이 후에도 1970~80년대 음악다방의 콘셉트를 되살린 '백다방 콘서트' 무대를 꾸준히 열어왔다. 창작에 대한 욕심은 갈수록 더하다. 올 봄에는 오래 살던 소래를 떠나 섬(영종도)으로 도망갔다. 술친구들 없는 곳에서 작품활동에 전념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쉽지 않은 모양이다. 오랜 팬들은 시도 때도 없이 바다를 건너 오고, 그 또한 정에 약해 하루가 멀다하고 섬으로 술친구들을 불러들여서다.

▶그런 그가 올 봄 코로나19에 맞서 분투하는 의료인들에 바치는 노래를 내놓았다. 제목이 '천사'다. '꽃은 피었는데/차마 볼 수 없는 봄 … 봄꽃보다 예쁜 아름다운 사람/사람 꽃/눈물 속에 피었네 … 힘들어도 아무 말 못하고/병 옮길까 봐 집에도 못 가 … 마스크 벗는/그 날 위해 뛰는 사람/영원토록 간직하렵니다/천사라는 그 이름을' 처음에는 질병관리본부의 SNS 채녈을 통해 퍼져 나가다 지난 주 한 지상파TV를 타면서 검색어 상위까지 올랐다. '추억의 신포동' '성냥공장 아가씨' 등을 쓰며 인천을 지키고 있는 가객 백영규의 노익장이 아름답다.

 

정기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