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개봉한 '데자뷰'라는 SF영화가 있다. 덴젤 워싱턴이 분한 주인공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장치를 통해 위험에 빠진 여인을 살리고 폭탄테러를 막아 500여명의 시민을 구해낸다. 프랑스어인 데자뷰(Deja Vu)에서 유래한 기시감(旣視感)은 정신의학에서 처음 보는 대상이나 처음 겪는 일을 마치 이전에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상한 환상을 말한다.

공상과학영화의 주제로도 쓰인 이 현상은 이미 보았지만 뇌에서 의미 없이 분류했던 기억을 끄집어내는 과정에 기인한다고도 하고, 처음 마주친 일을 이상하다고 느끼는 신경화학적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영화처럼 과거의 경험을 통해 재난을 막아낼 '착한' 데자뷰를 겪기는 어려운 것 같다.

2013년 초, 진주의료원이 경영적자를 이유로 문을 닫았다. 100년 가까이 진주권의 공공의료를 맡아왔던 병원은 시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환자가 줄자 경영적자를 명분으로 폐원되었다. 각계각층의 반대에도 강행한 폐원은 국회에서 '지방의료원 육성을 통한 공공의료강화계획'이라는 여야 만장일치의 보고서를 이끌어냈다.

영리적 의료 환경에서 경영에 매달려야 하는 지방의료원을 공공의료를 충실히 수행하고 신뢰받는 거점병원 역할을 하도록 주문했다. '착한 적자'(공익적 적자)를 지원하고 미충족·필수의료를 제공하도록 특성화하라 했다. 이로써 지방의료원이 '민간 의료기관과 별 차이 없는 저소득층이 가는 병원'에서 '지역 주민에게 꼭 필요한 공공병원'으로 변화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2015년 중동의 풍토병으로 알려져 온 메르스라는 병에 온 나라가 공포에 젖었다. 5월20일 첫 환자가 발생, 연말의 종식선언까지 환자 186명, 사망자 38명이 발생하고 1만6693명을 격리한 메르스사태는 대한민국이 보건의료 선진국이라는 착각을 허망하게 무너뜨렸다. 대부분 병원 내 감염이었으며, 환자 중 13.4%가 의료인력이었다.

보건복지부가 낸 '메르스 백서'는 허술한 방역체계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대안을 제시한 훌륭한 보고서이다. 역학조사인력과 조사체계, 병원감염, 나아가 우리나라 보건의료 전반의 문제까지 되짚어 보고 개선안을 냈다. 격리병상과 공중보건 및 역학조사인력 확충, 질병관리본부 강화와 질병관리청으로 격상, 권역별 감염병전문병원 설립과 중앙-지역 간 네트워크 구축, 감염병 대응 치료제와 보호구 비축, 병원감염 대응 강화와 선제적 투자로써 공중보건위기대응 예산확보 등 핵심적인 내용이 망라되어 있었다.

2017년 새 정부가 들어섰다. 국정과제에 의료공공성 확보를 천명했다. 일 년이 지나 발표한 '공공보건의료발전 종합계획'은 미충족 의료서비스와 취약계층 진료에 치중하는 잔여적 기능의 공공의료에서 감염, 응급 등 필수의료를 국가가 책임지고 공공의료가 이를 수행하는 것으로 확대 규정하고 전국 70개 중진료권에 지역책임의료기관을 만들어 공공의료를 수행하기로 했다.

코로나19는 설마설마 하는 가운데 앞날을 점치기 어려운 재난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역학조사관 부족', '공공병원 수와 인력을 늘려야', '질병관리본부 확대·강화', '공공병원, 운영비 부족으로 어려움', '공공의료 강화는 어디가고 의료산업화만?' 등 많이 들어온 말들이 또 들려온다. 데자뷰인가? 진주권역 의료원 재설립을 위한 과정은 이제야 시작되었다.

광주, 울산, 대전광역시에는 아직도 지역거점공공병원이 없다. 대구·경북 병상부족사태에 10년 전 문닫은 대구적십자병원이 그립지만, 1980년 시민군 치료를 도맡았던 광주적십자병원과 더불어 곧 민간매각이 완료될 것 같다. '의료공공성확보'라는 새 정부의 구호가 희미해 간다는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겨우 설립이 결정된 질병관리청은 얼마나 제 기능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바이러스처럼 보건의료의 위기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삶이 있는 모든 곳에 공공의료가 녹아 있어야 재난을 막을 수 있다. 심각한 건망증도 치매처럼 책임지는 국가면 좋겠다. 코로나19의 후유증 가운데 정책권자의 탁월한 기억력이 포함되어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데자뷰는 그만 겪었으면 참 좋겠다.

 

조승연 인천의료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