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같은 나의 삶은 특수임무요원과 그 가족의 인생”

 

 

▲ 박영애 유족대표 명예회장이 생부인 특수임무수행자 김학림 씨의 위패가 있는 특수임무유공자회 인천지회 사무실 1층에 마련된 추모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씨로 태어나 박 씨로 살아야만 하는 굴절의 삶을 지내야 했다. 유복자 아닌 유복자로 은둔의 생으로 숨죽여야 했다.

6·25전쟁과 남북분단, 그리고 아버지를 특수임무 요원으로 둔 딸의 생애는 하염없는 질곡의 누적이었다.

박영애(65·전 시의원)특수임무유공자회 인천지부 유족대표 명예회장은 그 굴곡진 제 가끔의 아픔을 처절했던 시대의 우리의 고통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때, 그 시절의 고한(苦恨)이 어찌 저 혼자만 겪었던 쓰라림이었겠습니까!” 그는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들을 낳고도 혼인신고조차 못 한 채 생이별을 그저 받아들여야 했던 어머니의 기구한 운명을 짐짓 들여다본다.

한 자식은 엎고, 또 자식은 손을 잡고 겨우겨우 알아낸 부대를 찾아온 아내에게 “남편은 전사했소,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오”라는 청천벽력의 소리를 위병 요원에게 전하게끔 한 아버지의 애끓는 숙명을 그는 어렴풋이 그려본다.

자식이 둘이나 달린 과부 아닌 과부에게 총각 장가를 가서 풀리지 않는 가냘픈 생애를 아등바등 버텼던 성(姓) 다른 아버지의 고뇌를 어슬어슬 짐작해본다.

초등학교를 나오자마자 사탕 공장과 나무젓가락 공장 노동자로 전전하다가 양품점 점원으로 떠돌아야만 했던 세 살 터울 언니의 가난했던 시절의 고단한 삶을 떠올린다.

“전쟁 같은 저의 삶은 특수임무 요원과 그 가족의 인생일 것입니다.” 박 명예회장에 6·25전쟁이 낳은 남북분단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총포와 화약이 아닌 특수임무유공자와 그의 가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5년 전 치열한 싸움의 길로 나섰다. K.L.O 8240부대 창설대원이었던 아버지 김학림(2014년 작고) 씨의 기록을 찾아 헤맸다. 지난해 11월에는 국방부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심의위원회에 접수했다. <관련기사 인천일보 홈페이지>

박 명예회장은 이슬처럼 사라진 '얼굴 없는 군인' 특수임무 요원을 위해 더 큰 일을 할 작정이다.

그는 28일 눈을 뜨자마자 서구 금곡동 무궁화 단지 추모 동산으로 향했다. 물주기로나마 쬐는 볕에 목말라 하는 어린 무궁화 120그루를 달래려는 심사였다.

박 회장은 무궁화 7532그루로 추모 동산을 차차 수놓을 작정이다. 임무를 수행하다가 숨졌거나 생환하지 못한 특수임무 요원 7532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박정환 기자 hi21@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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