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천'은 인천 토박이들에게 야릇한 향수를 자아내는 곳이다. 무엇이라고 딱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인천인들에게 '장소성'이 주는 추억에 젖게 한다. 이들은 소싯적 동인천 일대에서 흥청거렸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 곳엔 다방·술집·당구장·음악감상실·클럽 등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업소가 즐비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등의 행위가 자연스러웠다. 젊음의 거리였다. 적어도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 이후엔 각종 상권이 시청을 중심으로 한 구월동과 송도·부평 등지로 옮겨가면서 쇠퇴를 거듭했다.

동인천은 1883년 인천 개항 이래 한 세기를 풍미한 도심이다. 서구 문물 유입 통로로 자리를 잡으면서 여러 나라 상품의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1920년대 말을 전후해선 현 배다리~경동사거리~신포동을 중심으로 큰 상권을 이뤘다고 한다. 포목점과 양화점은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품목이었다. 양화점의 경우 1885년 단발령을 내린 후 양복·양장 차림이 늘면서 생긴 '개화 풍조'의 하나였다. 그런데 왜 '동인천'이라고 했을까. 아마 지역에다 방위 개념을 써서 이름을 짓는 풍습은 우리에게 익숙한 듯하다. 중구·동구·서구 등이 대표적인 예다. 동인천도 그런 방식이다. 인천의 동쪽이라는 말이다. 개항 후 인천 중심가 동녘에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동인천 번성엔 경인철도가 한몫 단단히 했다. 1899년 9월 경인선이 개통했을 때, 지금의 동인천역은 '축현(杻峴)역'으로 불렸다. '싸리나무가 많은 고개'에서 유래했는데, 당시 일본인들은 '축현'이란 말을 어려워했다. 그래서 역명 공모를 통해 1926년 4월 '상인천역'으로 개명했다. 일제시대부터 상당 기간 현 동인천역 앞과 신포동·싸리재·배다리 등지를 상인천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해방 이후엔 일제 잔재를 없앤다며 잠시 '축현역'으로 바꿨다가, 1955년 8월7일부터 동인천역으로 확정해 오늘에 이른다. 동인천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엔 근대문화유산이거나 문화유산급으로 꼽을 만한 장소가 많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인 자유공원을 비롯해 화도진, 답동성당, 내리교회, 배다리 헌책방 골목, 애관극장 등 기억할 만한 곳이 수두룩하다.

아무튼 동인천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최대 번화가'란 명성을 다른 지역에 넘겼다. 한때 번성을 누렸던 곳이 몰락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어찌 흥망성쇠가 나라에만 국한될까. 한 도시가 번창하고 쇠락하는 길도 마찬가지다.

인천시가 그런 생각의 방향을 틀어 '동인천역 2030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었다. 동인천역 주변 옛 영화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셈이다. 시는 얼마 전 '동인천 역세권 거점 연계 뉴딜사업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 용역 보고회를 열고, 동인천 일대 '부활'을 다짐했다. 아무쪼록 이 프로젝트가 동인천에 활력을 불어넣는 마중물 역할을 했으면 싶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