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개그 콘서트'가 잘나가던 시절, '감수성'이란 코너가 있었다. '북쪽의 오랑캐가 쳐들어와 평양성, 북한산성,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마지막 남은 감수성, 이 감수성의 장군들은 유난히 감수성이 풍부했으니 …'라는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요즘도 인기가 여전한 개그맨 김준현이다. 오랑캐가 쳐들어온 전쟁 상황임에도, 이 성을 지키는 장군과 병졸들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인해 벌어지는 해프닝들이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심한 말이나 행동을 보이면 배경음이 바뀌면서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한 사람이 심하게 삐치고, 말을 꺼낸 사람도 갑자기 싸한 분위기에 허둥지둥 사과를 한다. 주변 사람들까지 나서서 겨우 달래면 처음 상황으로 돌아오는 패턴이다.

▶감수성은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성질이다. 이전에는 아이들이 작가나 예술가 등으로 클 수 있느냐를 가리는 소양 정도로 여겨졌다. 요즘은 가히 감수성의 전성시대라 할만 하다. 아동학대가 빈발하자 아동권리 감수성 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초등학교 등에서는 환경 감수성 교육이 따로 있다고 한다. 의료계에서는 항암제 감수성 연구가 주목받고 있는 모양이다. 얼마 전 KBS의 '저널리즘 토크쇼J'에 대해 내부 공정방송위원회가 “출연자 선정이 제작 가이드라인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해명이 이랬다. “제작진의 감수성이 시청자의 감수성에 미치지 못했다.”

▶성인지 감수성도 요즘 핫한 용어다.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여성대회에서 처음 사용됐다고 한다. 합의된 정의는 아직 없지만 대체로 성별간의 차이로 인한 일상생활 속에서의 차별과 유_불리함 또는 불균형을 인지하는 것을 말한다. '미투' 운동이 한창일 때는 거의 매일 거론됐다. 그러나 너무 추상적인 개념인데다 기준이 모호하기는 여전하다.

▶이달 초 경기도 한 도시에서 '은행나무 여혐 유발'이 불거졌다. 구청에서 가로수인 은행나무 암나무들에 여성을 상징하는 표식(♀)을 달고 은행열매 조기 낙과를 위해 수간주사를 놓았다. 가을철 은행 열매로 인한 시민들의 악취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시민단체들이 들고 일어났다. “나무에 여성 표식을 달아 '암나무는 악취가 나고 해악을 끼치므로 피해야 한다'고 알리는 낙인찍기”라고 주장했다. “조례에 근거도 없는, 여성혐오를 유발하는 성인지 감수성 부재 정책”이라고도 했다. 결국 암나무 표찰을 모두 떼냈다지만 과한 느낌이다. 유교나 기독교, 사회주의도 종주국보다 더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민족이다. 댓글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바보들, 돈이 더 들더라도 수나무에 표찰(♂)을 달았으면 될 것을'

정기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