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인천자주평화연대추진위원회 위원장

얼마 전 TV 영화채널에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과정을 다룬 “나랏말싸미”라는 영화를 봤다. 흥행에도 실패했고, 창제과정에 대한 논란도 있던 영화였지만, 한글을 창제하여 모든 백성이 글을 깨우쳐 삶의 불편함을 덜고, 지식도 나누어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세종의 애민정신은 제대로 그린 영화였다. 당시 동북아의 패권은 명나라가 쥐고 있고, 조선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였음에도 세종은 사대주의에 찌든 신하들과 유생들의 반대를 뚫고 한글을 창제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조선이 중국의 속국임을 자처하며 양반 상놈의 계급질서를 유지하려는 사대주의 탓에 그 이후 500년 동안 한글을 천시하며 한문을 써왔다는 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국가적인 위신과 국민의 자부심이 이렇게 높았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90년대부터 드라마 부문에서 한류열풍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더니, 이어서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한글을 배우게 만들고 한국에 한 번 가고 싶게 만든 K-pop과 BTS(방탄소년단). 지난 2월에는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포함해 4개의 주요상을 휩쓰는 쾌거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곧이어 전 지구를 덮친 코로나19로 인한 팬더믹 속에서 모든 나라들이 K-방역을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꼽았다.

최근 남북관계가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 2018년 4.27판문점선언과 9.19평양공동선언, 그리고 문재인대통령의 평양 능라도경기장 연설, 백두산에 오른 두 정상의 다짐은 온데 간데 없고 듣기 거북한 말폭탄이 쏟아지고, 끝내 남북교류의 상징이었던 개성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다. 관계 악화에 대한 진단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간 남북관계 개선에 헌신해 온 임동원, 정세현,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 문정인 대통령특보 등은 하나같이 ‘한미워킹그룹’을 통한 미국의 부당하고 전면적인 간섭을 첫 번째 원인으로 꼽았다. 또한 우리 정부 내에 우리의 이익보다 미국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친미파’ 관료들의 문제도 함께 지적했다. 미국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이종석 전 장관은 우리가 북에게 합의이행을 요구하는 상황이 아니라, “북이 우리에게 합의이행을 요구하는 상황이 처음”이라며 “거친 말은 유감이지만 우리가 합의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뼈아프지만 맞는 얘기”라면서 남북관계가 군사적 충돌마저 걱정될 정도로 악화된 것은 우리 정부 책임임을 인정했다.

북이 문제 삼고 있는 대북전단 살포는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확성기 방송과 전단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 행위들을 중지”하기로 한 판문점선언 제2조 ①항 위반이다. 이명박정부 때는 5회, 박근혜정부 때는 6회 대북전단 살포를 막았다. 그런데 문재인정부 때는 단 한 차례만 막았을 뿐, 2018년 15회, 19년에는 11회, 올해도 4회나 방치했다. 북 지도부 제거를 겨냥한 참수작전과 한미연합훈련을 재개하고, 미국의 전략정찰자산이 한반도 상공을 비행한 것은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한 판문점선언 2조 ①항 위반이다. 국방비를 대폭 증액해서 미국의 전략무기를 대량구매한 것은 “군사적 신뢰가 실질적으로 구축되는 데 따라 단계적으로 군축을 실현”하기로 한 판문점선언 3조 ②항 위반이었다.

남북의 자주적 교류는 또 어떠했는가?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재개’ ‘도로 및 철도연결’ ‘방역, 보건, 의료협력’ ‘이산가족 화상상봉’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의 사업들이 이행되지 않은 것은 9.19평양공동선언 2조와 3조 위반이다. 미국과 유엔사에 의해 <한미워킹그룹>을 통해 원천 차단되었다고 핑계를 댈 수 있지만, 이는 “남과 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확인하였으며 이미 채택된 남북 선언들과 모든 합의들을 철저히 이행”하기로 한 판문점선언 1조 ①항을 남측 정부가 명백히 위반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많은 합의를 위반한 것은 문재인정부가 미국의 간섭과 강요를 떨쳐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은 트럼프대통령과 미국에 대해서, 정상회담을 정치적 치적으로 십분 활용하면서 합의 이행을 미루고 있다고 판단하고 “셈법을 바꾸라”면서 올해 초 ‘정면돌파전’을 선언하였다. 남측에 대서도 마찬가지다. 세 번의 정상회담과 선언을 남측 정부가 문재인대통령의 지지율 상승에 이용해 먹기만 하고, 미국의 압력을 핑계로 실질적인 합의 이행에 나서지 않고 있다고 판단하면서 남측에게도 ‘정면돌파전’을 선언한 것이다.

북은 지난 17일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다음 수순을 예고했다. 1. 개성공단지구와 금강산관광지구 부대 재배치 2. 철수 GP 복귀 3. 전선의 근무태세를1호 전투체계 격상과 접경지역 군사훈련 재개 4. 대남 삐라 대대적 살포가 그것이다. 사실상 9.19군사합의서 파기 수순이다. 이제 와서 남측 정부가 ‘합의 이행’을 요구하고는 있지만, 이는 만시지탄이다.

최악의 상황으로 가는 길을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뢰 회복이 급선무인데 청와대의 대북특사 제안을 거부한 것을 공개할 정도로 신뢰가 무너졌다. 이제 와서 북에게 ‘선언과 합의 이행’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국의 간섭과 유엔의 제재와 상관없이 진작 했어야 할 조치들을 먼저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다.

이미 실효성이 없어졌다면서 슬쩍 피해 갈 생각 말고 남북교류협력을 중단시켰던 5.24조치부터 명시적으로 해제하라. 남북공동선언과 합의를 국회 비준함으로써 거기에 법적 효력을 부여하고,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을 신속히 제정하라. 코로나19도 재확산 조짐인데 일체의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고, 국방비를 삭감하여 긴급재난지원금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한국판 뉴딜 재정으로 투입해야 한다. 아울러 남북간 교류와 협력 차단 수단으로 변질된 ‘한미워킹그룹’을 사실상 해체해야 한다. 한미워킹그룹은 한미 간의 단순한 실무협의체이지 미국의 ‘한국총독부’는 아니다.

일부에서 강경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문재인정부도 북의 연이은 거친 발언에 강경한 발언으로 일단 대응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여야 한다. 북도 대남 전단 살포까지는 조만간 강행하겠지만 추가적인 군사적 조치는 잠시 미루면서 남측의 대응을 지켜 볼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의 강경대응은 북의 군사적 대응을 앞당길 뿐이다.

가까운 미래에 남과 북이 평화롭게 교류하고 통일이 가까운 현실로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돌연 찬바람이 부는 현실을 보면서, 정말 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험난하단 생각을 다시금 갖게 된다. 미중러일 4대 강국 모두 남북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 앞에 남북이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남과 북, 그리고 해외 8천만 겨레가 외세의 압박과 간섭에 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풀어갈 수밖에 없다는 원칙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세계 시민들의 부러움을 받고 있는 우리가 언제까지나 미국의 눈치만 보고 끌려갈 수는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은 미국의 이익이 우선되는 ‘식민지’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이익이 우선되는 ‘주권국가’다. 거기에 길이 있다.


/이성재 인천자주평화연대추진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