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비와 안개의 계절이었다. 기후는 마치 우기가 시작된 듯 보였고, 불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6월 중 안개 낀 시간은 70시간 정도였다. 이 수치는 우리가 항해 중 기록해 두었던 보고서로 판단할 때 매년 6월 중 그것과 비교해 상당히 적은 시간이었다. …월말엔 최고와 최저 온도 차이가 커지기 시작했다. 낮 최고 온도는 영상 31.9도까지 이르렀다. 이는 지난 4년간 6월 온도 중 최고에 해당한다.…”

요즘 기상예보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30여년 전 기록이다. 1892년 제물포항의 기상을 1~12월 월별로 관측해 적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간행한 월간 잡지 에 실렸다. 그만큼 인천은 수도 서울과 인접한 지정학적 입지로서 큰 역할을 했다.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해관의 기상관측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선박 계류시설이 불편했던 당시 본선(本船)에서 화물이나 사람을 안전하게 옮기려는 '수단'이었다고 한다. 인천에서 정규적인 기상관측은 1883년 9월1일 인천해관에서 시작됐다. 이것이 공식적인 최초의 기록이다. 이듬해 1월1일부터 인천해관에선 기온·기압·강수량 등 기상 요소를 종합적으로 관측했다고 전해진다.

일제는 인천 개항 후 한반도 침탈 목적의 하나로 1904년 4월6일 제물포에 일본중앙기상대 제3임시관측소를 설치했다. 현 중구청 뒤쪽 송학동에서 관측 업무를 시작한 후 다음 해 1월1일 응봉산(현 자유공원) 정상에 신축 청사를 지어 옮겼다. 우리나라 첫 신식 기상관측소다. 그 무렵 정오를 알리는 포를 쏘는 일도 여기서 맡았다. 1907년 4월1일엔 국내 임시 관측소들이 통감부 관측소와 그 산하 측후소로 개편됐다. 그러면서 인천은 새로운 기상관측 중심지로 떠올랐다.

광복 후 현 인천기상대는 수차례 변화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1949년 8월엔 국립중앙관상대로 승격했는데,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때 주요 건물과 문헌을 소실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1953년 11월 국립중앙관상대가 서울로 이전함에 따라 인천측후소로 바뀌었고, 1992년 3월엔 대전지방기상청 인천기상대로 개칭됐다. 인천기상대는 인천·김포·부천·시흥·광명 지역 기상서비스를 발굴·지원해 기상재해로부터 주민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구실을 한다.

인천은 예나 지금이나 기상관측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기상청은 이를 감안해 2022년까지 인천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발생하는 '위험기상'을 조기탐지할 수 있는 제2 해양기상기지를 옹진군 덕적도에 짓기로 했다. 편서풍대에 속한 국내에선 집중호우·폭설·황사 등 대부분의 위험기상이 서해상에서 발달해 들어온다고 한다. 기상청은 기지 건설로 한반도 서쪽 해상과 고층기상 관측망을 확대할 예정이다. 국내 최초의 근대식 기상대를 설치한 인천의 위상을 새삼 확인하는 계획이 아닌가 싶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