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무릅쓴 항해 … 수백·수천년 흘러 우리곁에 왔다

황해 한·중·일 해상교류 가장 활발했던 곳
고대 항로 오갔던 배들, 바닷 속에서 발견

고대 해상교류사 다시 쓰게 만든 발굴
영흥도선, 장보고와 같은 통일시대 선박
2013년 부터 철분 빼는 복원작업중

신안선, 원나라 국제무역선 목포 전시관에
7점의 고려청자·28t 넘는 중국 동전 눈길

봉래 3·4호선, 펑라이 앞바다서 발굴
2012년 학술대회서 고려 선박 인정받아

고대로부터 황해를 중심으로 다양한 교류활동이 있었다.

이를 위해 단순한 뗏목에서부터 통나무배, 구조선에 이르기까지 바다를 오가는 선박의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특히 황해는 한국과 중국, 일본 3개국의 해상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곳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고대 항로를 오갔던 수많은 배가 최근 수백 년의 시간을 뚫고 바닷속에서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바다에서 발견된 고선박은 총 14척이다. 고려 시대 선박이 10척으로 가장 많고, 통일신라와 조선 선박이 각 1척씩이다. 나머지 2척은 중국 배로 알려져 있다. 중국 바다에서 발견된 우리 선박도 2척이 있다.

이 중 고대 해상교류사를 다시 쓰게 만든 중요한 발굴을 꼽는다면 단연 신안선과 영흥도선, 봉래3·4호선일 것이다.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신안선'은 비록 중국 원나라 시대 선박이지만 한국 수중고고학의 시작을 알린 위대한 발견이었다. 이와 함께 우리 바다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선박인 인천 '영흥도선'은 장보고 시대의 해상교류사를 재현시켰다. 아울러 중국 산둥성 펑라이에서 발굴된 봉래 3·4호선은 최초로 고려 시대 국제무역선의 모습을 알려준 쾌거였다.

■ 바다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국제무역선 '인천 영흥도선'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내 영흥도선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내 영흥도선

인천 영흥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영흥도선'은 바로 해상왕 장보고가 한·중·일을 잇는 활발한 국제교역활동을 벌이던 시대와 같은 통일신라시대 선박이다. 가히 동아시아 고대 선박사를 다시 쓰게 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인천 옹진군 영흥면 섬업벌 해역에서 2012년과 2013년 두 차례에 걸쳐 수중 발굴조사가 진행한 결과 수습한 목제 선박이 8세기 무렵 통일신라 시대 배로 확인됐다.

잔존 선체는 길이 약 6m에 폭 1.4m의 3단으로 결구(結構)한 상태였다. 그 위에는 철제 솥과 도기를 비롯해 비교적 무거운 선적물에 눌려 있어 유실되지 않고 남았다. 전체 크기는 15m 내외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 국제무역선이 20~30m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통일신라 시대 국제무역선으로 크기로는 손색이 없다는 평가다.

선체 부재는 배 밑의 저판(底板) 1열과 저판과 외판을 연결하는 L자형 부재인 만곡종통재(彎曲從通材) 2단을 합친 총 3단이었다. 고려 시대 이전의 방식이다.

이외에도 통일신라 시대 배로 확정한 근거는 여러 가지다.

우선 배 저판과 만곡종통재를 연결하는 데 사용한 장삭이라는 나무못이 기존 고려 시대 선박과는 달랐다. 통일신라 시대 배인 경주 '안압지선'과 유사했다.

또한 선체 내부에서 발견된 도기 6점과 철제 솥 12점, 동제 용기 1점, 사슴뿔 2점도 대체로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유물들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선적된 토기에 들어 있는 황칠이다. 황칠은 한반도 서남해안 완도, 보길도 등지에 자생하는 황칠나무 수액을 짜서 가공한 도료다. 일찍이 고대 중국 등에서 황금빛을 띠며 내구성이 뛰어난 최고의 도료로 널리 칭송받았고, 부와 권위의 상징으로 고급 갑옷, 장식품 등에 칠했다. 삼국시대부터 사용해 왔으며 원형에 가까운 상태를 지닌 채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 배가 국제무역선인 근거는 바로 철제 솥 때문이다. 발굴 당시 철제 솥 12점은 겹겹이 쌓인 모습으로 나왔다. 바로 선적 화물이었다는 점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김병근 박사는 “영흥도선은 통일신라 시대 국내든 국외든 바다를 오가던 무역선인 것은 확실하고 장보고가 활동했던 시기와 일치한다”면서 “장보고 선단의 배라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인천을 대표하는 유물이지만 복원작업은 여전히 요원하다. 현재 발굴된 선체는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 보관돼 있다. 2013년부터 물속에 넣어 염분과 철제 솥에서 나온 철분을 빼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 작업만 최소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이 작업을 마친다고 해도 복원까지는 난관이 적지 않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선박 목재에 철제 솥이 부식된 철성분이 많이 침투하면서 항산화돼 목재 성분이 거의 날아갔는데 이를 어떻게 제거해야 할지 고민거리”라며 “더구나 복원작업을 한다고 해도 복원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한국 수중고고학의 시작 '신안선'

▲ 국립해양 유물전시관에 진열된 신안선 모습
▲ 국립해양 유물전시관에 진열된 신안선 모습

전남 목포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관에 가면 엄청난 크기의 고대 선박을 볼 수 있다. 국내에서 발굴된 고선박 중 가장 규모가 큰 이 배가 바로 700년 전 중국 원나라시대 국제무역선인 '신안선'이다.

1984년 인양 당시 선체는 길이 24.2m, 너비 9.15m 에 달했다. 상판까지 복원할 경우 길이 약 34m, 최대 폭 약 11m, 높이 8m이고 중량은 200t 정도로 추정된다. 약 100여 명을 태울 수 있는 규모다. 당시 국제무역선의 크기가 20~30m 정도였으니 그중에서도 꽤 큰 규모다.

신안선은 1323년 중국 저장성 경원(닝보)에서 일본 하카타(후쿠오카)로 향하던 배로 전남 신안 증도 앞바다에 침몰했다. 이 배에는 일본으로 수출하는 도자기와 동전, 금속 공예품, 칠기, 자단목 등이 실려 있었다. 14세기 중국 무역선의 잠을 깨운 것은 1975년 어부의 그물에 걸린 중국 도자기 6점이었다. 도굴범들의 타깃으로 연일 방송을 타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부터 수중발굴이 시작됐다. 관련 수중전문가가 전무한 시대였기에 해군 특수부대와 함정이 동원됐고 11여 차례의 조사를 통해 1984년까지 유물 2만4천여 점과 28t 무게의 동전 800만개가 나왔다.

인양된 도자기의 모습은 흥미로웠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완형의 신품들이었다. 같은 종류의 그릇을 10개나 20개씩 포개 끈으로 묶은 다음 나무상자에 넣어 포장한 것이었다. 바로 상품을 싣고 가던 대형 국제무역선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특이하게 7점의 고려청자가 확인된 것도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당시 한·중·일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멀리 인도와 페르시아까지 해상무역이 활발했다는 증거품이 나왔다. 바로 배에 실려 있던 자단목이다.

자단목은 인도나 동남아, 중국 남부가 원산지인데, 불상이나 고급 가구, 공예품의 원자재다. 여기에는 한자 부호나 숫자, 혹은 아라비아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국제 상인들이 원산지를 드나들며 남긴 흔적으로 보인다.

신안선에서 확인된 엄청난 양의 동전은 지금도 미스터리다. 무게만 28t이 넘고 수량으로는 800만개에 이르렀다. 세계 최대 중국 동전 보유국이 바로 한국인 된 셈이다.

배에서 확인된 동전은 66종에 이르렀다. 신(기원후 8~23년)에서 제작된 화천(14년) 및 후한의 오수전(25~219년)부터 원나라 지대통보(1310년)까지 1300년 동안 중국에서 제작·유통된 동전이 모두 나왔다. 신-후한-당-북송-남송-요-금-원 및 서하시대까지 심지어 안남(베트남)에서 만든 동전(천복통보·天福通寶)까지 나왔다.

신안선의 구체적 성격은 어떻게 밝혀졌을까. 바로 배에서 나온 300여점의 목간 덕분이다. 지금으로 치면 화물 운송장의 역할을 했던 물건인데 운송 시기와 수신인, 수취인, 화물 내역 등이 나무에 적혀 있었다. 작은 나무토막에 불과하지만 그 중요성은 어느 것보다 큰 유물인 셈이다.

 

■ 고려의 국제 무역선 봉래 3·4호선

▲ 중국 산둥성 펑라이 수성의 고선박물관에 전시된 봉래 3호선.
▲ 중국 산둥성 펑라이 앞바다에서 발견된 봉래3호선의 발굴당시 모습.

중국 산둥성 펑라이 수성의 고선 박물관에 가면 여러 고대 선박을 볼 수 있다. 이 중 2척의 선박이 바로 고려 국제무역선으로 불리는 봉래 3·4호선이다.

봉래 3호선은 선체 잔존길이가 17.1m. 폭 6.2m로 선박 밑부분인 저판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상판까지 복원할 경우 본래 크기는 25m 전후로 예상된다. 봉래 4호선은 길이 4.8m, 폭 1.96m 정도의 저판과 외판 등 4편의 선체 조각이 남아있다.

이 배는 지난 2005년 펑라이 앞바다에서 발굴될 당시부터 국적 논란이 뜨거웠다.

여러 차례 한중 공동 학술회의 등을 통해 지금은 고려 시대 선박으로 인정받고 있다. 펑라이 고선 박물관에서도 고려 시대 무역선으로 표시해 전시하고 있다.

고려 선박으로 인정받기까지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지금도 몇 가지 부분에서는 여전히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봉래 3·4호선을 연구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김병근 박사는 중앙 단면과 저판 구조, 외판구조, 추진구, 돗자리, 고착 도구. 수종, 고려청자 출토 등 모두 7가지 근거를 들어 고려 선박임을 증명했다.

중앙 단면 구조는 배 밑바닥이 3열 구조의 평저형 선박으로 긴 장삭(나무못)을 이용해 통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좌우로 외판재를 어린식(물고기 비닐식)으로 붙여 올려 피삭으로 고정했다. 이는 중국 선박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 선박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구조다. 선체에 사용한 나무도 한선의 주재료인 소나무로 만들었다. 장좌공(돗대를 끼우는 구멍)이 중앙저판재의 중심부에 설치된 점도 한선의 형태다.

실제 전남 신안 앞바닥에 발굴된 '안좌도선'과 '달리도선'이 펑라이 3호선과 구조상 유사점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봉래 3호선에서 발굴된 고려청자 2점이다. 청자발과 접시로, 분청사기 전 단계의 형태와 문양을 지닌 상감청자다.

여전히 중국 학자 중에서는 중국 원대의 기술교류로 고려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봉래 3호선의 경우 중국 선박의 특징인 철정(쇠못)과 격벽시설, 장좌, 동회유의 사용 등은 기술교류 혹은 다른 분석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 배가 발굴되지 전까지 고대 국제무역선은 대부분 중국 선박이었다.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의 해상무역이 활발했음에도 국제무역선의 실체가 규명되지 않았다. 봉래 3·4호선은 고려가 황해를 중심으로 국제 해상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증거품인 셈이다.

김병근 박사는 “처음 봉래3·4호선을 발굴했을 때 중국에서는 약간 이질적인 배라며 평가하며, 한국 선박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2012년 공동학술회의에서 1시간이 넘는 끝장토론 끝에 중국 전문가들이 고려 선박임을 인정했다”면서 “특히 국제무역선의 기본인 격벽(한곳이 침수돼도 운행이 가능하도록 칸막이를 설치)이 한국 선박에 존재하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 봉래3·4호선의 발굴로 해소됐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