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기 후반 송(宋)나라에 파견되었던 고려의 사신들은 수도 카이펑(開封)의 국자감에서 다양한 서적을 사들였다. 당시 송나라는 상서성(尙書省)의 조령(條令)으로 역사서의 국외반출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려의 사신들은 국자감의 관리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통해 슬그머니 역사서를 모으려고 했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사람이며 <적벽부(赤壁賦)>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송나라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 1037~1101)는 이런 사실을 알고 격분했다. 그는 세 통의 상주문(上奏文)을 작성해 고려 사신들에게 절대로 중국의 역사서를 넘겨주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고려의 지식인들이 중국의 역사서를 읽게 되면 송나라와 대치상태에 있는 거란(契丹)에 중요한 정보가 유출된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다.

그러나 진실은 다른 데 있었다. 중국에서 역사서와 달리 <시경>, <서경>, <논어>, <맹자> 등 경서 구매는 전혀 금지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경서는 변방의 사신들에게 적극 권장했다. 경서에는 먼 옛날 성스러운 임금들의 빛나는 위업과 아름다운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고원한 도덕원칙과 이상정치의 청사진이 담겨 있었다. 반면 역사서에는 권모술수, 모략, 중상, 배신, 찬탈의 어두운 기록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주희(朱熹, 1130~1200)는 어린 학생들에게 “역사서를 읽지 말라”고 했다. 역사에는 위대한 업적과 사상이 담겨져 있지만, 동시에 보통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일과 비리가 적나라하게 엿보이기 때문이리라. 조선왕조에 와서 중화(中華)세계는 흠모의 대상일 뿐 결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모화(慕華)사상이 모든 면에서 더 깊어지고 굳어졌다. 그러나 세종은 여느 임금과 달리 역사서에 관심이 크고 깊었다. 실제로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는 경학보다 사학이 더 배울 것이 많고 실용성이 있다고 믿었다.

또한 태산처럼 높고 권력화된 경서의 권위를 극복하는 논리와 실리를 추구하기엔 역사서만큼 효용성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세종이 가장 애독한 역사책은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이었다.

이 책은 동주(東周)가 망한 기원전 403년부터 송나라가 세워진 960년까지 1362년의 중국사를 연대순으로 서술한 편년체로서 모두 294권에 이르는 방대한 거질(巨帙)이다. 책 이름은 송나라 황제 신종(神宗)이 “예전의 일을 거울삼아 치도(治道)에 보탬이 된다”는 뜻으로 명명했다. 저자 사마광은 전권에 걸쳐 “臣光曰, 사마광이 말합니다”라는 평론을 넣어 완성시켰다. 이 책은 '중국사'라고 하지만 당시 중국은 주위의 여러 나라들과 폭 넓게 교류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천하, 즉 세계사의 성격이 짙다.

세종(16년 7월)은 <자치통감> 500질 이상을 인쇄하는 데 필요한 30만권 분량의 종이를 준비하라고 명했다. <자치통감> 인쇄를 위해 종이를 각 도에 분배해서 만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 앞서 대마도에서 빨리 자라는 닥나무 묘목을 가져다가 강화도와 하삼도 바닷가 등지에 심도록 했다. 세종은 <자치통감>의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꼈기에 여러 역사책을 참고해 <자치통감>의 힘든 부분을 풀이하는 훈의(訓義)작업을 실시해 누구나 읽기 편하도록 작업했다. “요즘 이 책을 읽으면서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다. 총명이 날마다 더하고 수면이 아주 줄었다”고 세종(16년 12월)이 윤회(尹淮)에게 한 말이다 <자치통감>과 <자치통감훈의>를 세종이 직접 지휘해 발행하니 단지 종이의 질과 생산량을 높이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활자와 인쇄술도 이때 혁신되었다. 종이를 제조하는 일은 거의 승려들이 담당했다. 당시로서는 임금이 결심하지 않는다면 그 시간과 정성, 자원이 충당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참으로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종(23년 6월)은 정인지에게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라고 명한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잘된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앞 시대의 정치에서 잘한 일과 잘못한 자취를 살펴야 한다. 그 자취를 보려면 오직 역사의 기록을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모두 넓게 공부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임금이 만기(萬機)를 보살피는 여가에 어떻게 넓게 독서할 수 있겠는가? 또 우리나라도 건국한 지 오래됐으니 흥하고 망하고 잘하고 못한 것을 알아야 한다. 너무 번다하거나 너무 간략하게 하지 말라.” 요컨대 중국과 우리나라 역사에서 잘한 일과 잘못한 일, 흥하고 망한 일들에 관한 자료를 뽑아 정리된 책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정치의 거울로 삼게 하라는 것이다. 세종은 수양대군에 총지휘를 명해 출판을 독려했다.

4년여가 지난 세종 27년 3월에 정인지가 임금에게 전문(箋文)을 올린다. “잘 다스리는 자는 흥하고 잘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망하나니 득과 실이 모두 역사에 실려 있으며 권선징악을 후세인에게 보여 줍니다. 여러 책에서 골라 모아 역사적 사실을 밝게 실었습니다.” 이 책은 150권이나 되는 방대한 책인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을 거쳐 중종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출간되었다. 세종이 살아 있었다면 무척 안타깝게 여겼을 것이다.

백성이 글을 알면 정치하기 어렵다고 여기던 시절, 유교의 권위가 철벽같이 옥죄던 시절 백성의 주권이 기초가 되는 훈민정음을 신료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독하게 창제한 세종은 1776년 독립선언서를 쓴 서양의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이나 인권을 주장한 어떤 학자들보다 수백년 앞서 선진적인 인식을 보여주었다. 황제와 권력자의 역사에서 백성을 바르게 이끌 수 있는 슬기와 용기를 찾아 몸을 던진 임금, 그 분을 다시 한번 새롭게 맞이해야 한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 본래 귀천(貴賤)이 없었다.” “노비(奴婢)도 하늘이 낸 천민(天民)”이라고 입버릇처럼 선언한 세종은 일찍이 백성과 함께한 사람이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