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권회복의 꿈, 감악산 자락서 지다

 

 

 

 

▲ 윤인순 의병장 순국지인 적성군 동면 문암리(현 파주시 적성면 적암리).  /사진 제공=포천 현강역사문화연구소장 이우형
▲ 윤인순 의병장 순국지인 적성군 동면 문암리(현 파주시 적성면 적암리). /사진 제공=포천 현강역사문화연구소장 이우형
▲ 윤인순·연기우 의병장의 고시문에 대한 보고서. (<폭도에 관한 편책>. 1908. 11. 12.)
▲ 윤인순·연기우 의병장의 고시문에 대한 보고서. (<폭도에 관한 편책>. 1908. 11. 12.)
▲ 140~150명 규모의 윤인순 의진에 관한 보고서. (<폭도에 관한 편책>. 1909. 01. 04.)
▲ 140~150명 규모의 윤인순 의진에 관한 보고서. (<폭도에 관한 편책>. 1909. 01. 04.)

 

▲ 윤인순 의병장 묘. 경기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12-1에 있다.
▲ 윤인순 의병장 묘. 경기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12-1에 있다.
▲ 윤인순 의병장의 전사. (<폭도에 관한 편책>. 1909. 03. 18.)
▲ 윤인순 의병장의 전사. (<폭도에 관한 편책>. 1909. 03. 18.)

이은찬·김연성 의진과 연합작전 통해
가평·양주 등 경기북부서 일본군과 격전
140~150명 서양총·화승총·피스톨로 무장

일본군 1909년 초부터 대대적 진압작전 전개
3월16일 혹은 17일 문바위골서 교전 중 전사

 

◆ 창의원수부 및 경기 북부지방 의진들과 연합하다

1908년부터 1909년에 걸쳐 임진강과 감악산 중심의 주요 의진을 살펴보면, 황해도 평산·해주와 인접한 경기 지역에서는 13도창의진 교남의병대장으로 활약한 박정빈(朴正彬)을 중심으로 이진룡(李鎭龍)·한정만(韓貞萬) 등의 의진, 강화도, 연평도, 장단, 적성 등지를 중심으로는 13도창의진 대대장 출신 연기우(延基羽)와 안무장 출신의 김수민(金秀敏) 중심으로 평산 출신의 이근수(李根秀), 강화에서 건너간 지홍윤(池洪允), 가평 출신의 하상태(河相泰) 등이 이끄는 의진과 연계하였고, 감악산을 중심으로 한 양주·연천·파주 지역은 13도창의진 본진 중군장 출신의 이은찬(李殷瓚)은 윤인순(尹仁淳)·정용대(鄭用大)와 함께 창의원수부를 형성하였는데, 여기에 13도창의진 호서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의진에서 활약했던 김연성(金演性) 의진이 연합하여 의병투쟁을 펼쳤다.

1908년 12월4일 윤인순은 이은찬과 김연성이 이끄는 의진과 연합하여 12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기도 가평군 상면 서파동(西波洞)에서 포천 수비대 및 경찰대와 교전을 벌였고, 12월7일에는 30여명의 의진을 이끌고 양주군 고주내면 광숭리(廣崇里)에서 양주 헌병대와 교전을 하는 등 지속적인 의병투쟁을 이어갔다.

 

“폭도수령(의병장-필자 주) 윤인순(尹仁順/淳)

위의 자는 근래 부하가 140~150명이며 무기는 서양식 총 110여 정, 화승총 35정, 피스톨 4정, 군도 10자루를 휴대하고 있다고 하는데, 12월 하순 수십 명의 부하를 이끌고 포천군 광릉천(光陵川)에서 양주군 어등산면 내촌(內村)에 와서 숙박하고 그곳 인민들에게 군량미 100석씩을(한 마을에 대해) 10일 이내에 포천군 산내면(山內面)에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고 파주군 지방을 향해 그곳을 출발했다고 함. 그리고 근일 중으로 황재호(黃在浩)의 한 무리와 합쳐서 동지 모집 및 금품 약탈 방법을 협의하고 통문을 배부할 예정이라고 함.” (<통감부문서> 10권. '헌병대기밀보고'. 1909. 1. 4.)

일본 헌병대의 기밀보고서에 드러난 윤인순 의진의 규모는 의병 수가 140~150이고, 서양총 110정과 화승총 35정, 피스톨 4정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하니, 당시로써는 상당히 큰 규모였다. 그리고 군수품으로 양주군 어등산면 각 마을에 쌀 100석치를 제공하라고 하고, 영평·적성·파주 지역에서 활약하던 황재호 의진과 연합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근래 철원, 평강, 삭녕군 지방은 연기우, 윤인순 등이 30~50명, 드물게는 100명 정도의 집단을 이루고 횡행하며 주식(酒食)을 강청하고 혹은 금품을 약탈하고 있어서 인민은 안도할 수 없음. 그리고 그 무리 중에 수십 명의 청국인도 가담해 있다는 것인데, 청국인들은 인민에 대해 “우리는 청국의 의병으로 근래 본국으로부터 한국 의병과 합세하여 너희들을 보호하기 위해 왔다.” 운운하며 큰소리치고 있다고 함.” (<통감부문서> 10권. '헌병대기밀보고'. 1909. 1. 6.)

윤인순 의진은 연기우 의진과 함께 삭녕·철원·평강 지역까지 나아가 의병투쟁을 벌였는데, 의병 가운데 청국인도 참여하고 있다는 기밀보고서이다.

일제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창의원수부 의진의 의병투쟁은 줄기차게 계속되었는데, 양주경찰서장이 내부경무국장에게 보고한 문서 '영비발 제69호'(1909. 2. 9.)에는 창의원수부 의진이 일본 헌병 세 부대와 전투를 벌인 것이 드러나고 있다.

“본월 4일 영평군 이동면(영평읍을 거하기 동방 2리)에 약 300명의 폭도(暴徒:의병-필자 주)가 집합하였다는 정보에 접하고 동 헌병분견소장은 상등병 1명, 보조원 4명을 인솔하고 동 방면으로 향하였던 바 동 면 중진리에서 약 200명의 폭도에 의하여 포위공격을 받아 겨우 포위를 벗어났으나 그때 보조원 1명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후 동 면에서 영평 및 지포, 포천의 세 헌병대가 연합, 그 폭도와 교전 중이라 하여 지난 5일 오후 5시 양주헌병분견소로부터 이의 응원으로 상등병 3명, 보조원 7명은 동 방면에 급행하였다.

그 폭도의 수괴는 불명이나 아마도 이은찬, 윤인순 등이 인솔하는 비단(匪團:의진-필자 주)이라고 사료된다. 그리고 그 후의 상보는 아직 불명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263~264쪽)

일제는 경기 북부지방 의병이 좀처럼 진압되지 않고, 오히려 의진끼리 연대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헌병대, 경찰대에 맞서니, 일제는 1909년 연초부터 2월까지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전개하자 의병들의 활동이 무척 어려워졌다.
 

◆ 의병들과 함께 장렬하게 순국하다

윤인순 의진은 3월7일 파주군 한기리(塞基里)로 나아갔고, 이튿날에는 파주군 둔방리(屯防里)에서 1박 한 후 다음날 새벽 양주군 광적면으로 향하는 등 10~20명의 소규모로 분산시켜 유격전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일제는 3월8일부터 다시 이른바 '무단적 토벌'을 위해 양주와 인근 지역 헌병 100여명과 수비대 90명을 동원하였고, 15일부터 용산수비대 1대대장 키토(木藤)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등 300여 명의 총공격에 나섰는데, 윤인순 의병장은 삭녕수비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3월16일 오전 7시30분 문암리(文岩里, 적성군 동면일 것이다)에서 삭녕수비대 오무라(大村) 소위가 인솔하는 토벌대는 비수(匪首:의병장-필자 주) 윤인순이 인솔하는 약 16명의 폭도와 충돌하여 적괴(賊魁:의병장-필자 주) 윤인순 및 그 부하 2명을 죽이고, 30년식 보병총 1정, 기타 수점을 노획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519~520쪽)

“경기도 삭녕수비대 소위 이하 28명은 3월17일 양주 북방 약 4리 분암리(分岩里)에서 적 16명과 충돌,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 尹仁順(尹仁淳이라고도 한다. 경기도 북부를 횡행하던 자) 이하 3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845쪽)

윤인순 의병장은 적성군 동면 감악산 기슭 문바위골에서 전사했는데, 순국에 관한 일제의 기록은 두 곳에 나온다. 양주경찰서장이 내부경무국장에게 보고한 문서에는 3월16일이고, 일본군 참모장이 내부경무국장에게 통보한 문서에는 3월17일로 나와 있으며, 순국한 장소도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의병들은 윤인순 의병장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장례비를 모금한 기록도 보인다.


◆ 윤인순 의진 포상자는 아직도 미진하다

윤인순 의병장에 대한 연구가 늦어 1982년에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지만, 아직도 당시 의병 발굴은 미진한 상태이다.

윤인순 의진과 연계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의병장으로는 강기동(서울, 대통령장), 연기우(삭녕, 대통령장), 이은찬(강원 원주, 대통령장), 정용대(적성, 독립장), 김연성(양주, 애국장), 전성서(적성, 애국장) 등이 있고, 피체되어 징역이나 유형을 받아 고초를 겪은 분으로는 김경록(장단, 유형 10년 애국장), 김수동(포천, 징역 3년 애족장), 김윤종(파주, 징역 15년 애국장), 김해룡(풍덕, 유형 10년 애족장), 백영현(파주, 징역 5년 애족장), 변성오(서울, 징역 3년 애족장), 성낙희(장단, 징역 10년 애국장), 서춘만(포천, 유형 5년 애족장), 어봉선(양주, 징역 5년 애족장), 우병창(양주, 징역 3년 애족장), 윤치대(파주, 유형 5년 애족장), 전운룡(양주, 징역 5년 애족장), 한인수(평북 영변, 징역 2년 애족장), 홍원유(적성, 불명 애국장), 홍준성(개성, 징역 5년 애족장), 홍희영(파주, 유형 5년 애족장) 등이 있다.

1908년 2월 윤인순 의진에서 무기 조달과 운반을 한 혐의로 금고 2개월의 형을 받았던 질그릇 행상 출신 김삼석(金三石) 의병, 윤인순 의진에 참여하여 1907년 12월 양주군 묵은면에서 군자금 마련 활동으로 징역 3년을 받은 송창근(宋昌根), 1908년 12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윤인순 의진과 정용대 의진을 오가며 양주 일대에서 군자금 마련 활동으로 5년의 옥고를 치른 김현기(金顯基) 의병 등은 필자가 발굴, 지난해 6월 국가보훈처에 포상을 신청한 215명 중, 세 분이기도 하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