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는 창간 이후 30여 년간 지령 9000호를 내기까지 인천과 경기도의 지역사를 낱낱이 기록해 왔다. 기자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루하루 시대의 증인으로서 기사를 써 왔고, 경영진들은 온갖 고초를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렀다. 언론 공백기를 거쳐 창간해 지령 9000호를 일궈낸 역사를 직접 보아온 필자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광복되던 해 지역 언론인의 꿈을 세워 출범한 대중일보가 인천신보-기호일보-경기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꿔가며 자타가 공인하는 경기도 제1의 지역지로서 지령 9000호를 낸 것은 1973년 8월10일이었다. 그 무렵 경기매일신문은 중앙동 사옥을 7층으로 증축하고 일본에서 시간당 3만 부를 찍는 윤전기를 들여와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청천벽력과도 같은 군부의 '통합'이라는 언론 탄압은 예상치 못했다. 도내에서 가장 크고 제일 오랜 역사를 지닌 경기매일신문을 연합신문, 경기일보와 통합해 수원으로 가져간다는 것은 인천의 지식인들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경기매일신문이 그에 응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다음은 필자가 그때 실제로 들은 이야기의 한 토막이다.

당시 경기매일신문의 주필 겸 상무였던 필자의 선친은 어느 날 아무런 연락도 없이 집에 돌아오시지 않았다. 이미 사건의 전조를 대충 선친으로부터 듣고 있던 차이긴 했지만 가족들은 걱정을 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아버지의 말씀은 인하공사 지하실에 끌려간 사장과 편집국장을 맞기 위해 회사에 계셨다는 것이다. 전언의 요지는 이렇다.

송수안 사장과 김형희 국장이 연행되어 갔는데 3사 통합에 찬성한다는 것과 9월1일자부터 신문을 발행하지 않겠다는 합의서에 도장을 찍으라는 강압에 못 이겨 송수안 사장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도장을 찍었고, 옆에 있던 김형희 국장은 군화 발로 정강이를 차이는 수모를 겪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뤄진 것이 소위 말하는 '3사 통합'이었다.

훗날 경기매일신문 편집국장이었던 김형희 선생은 '인천언론사'(인천언론인클럽 간행)에서 당시를 회고하면서 “이로써 인천은 신문사 없는 도시가 되었다 … 송 발행인이 거절하자 군화 한 발이 내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이다 … 때릴 테면 때리라고 외치는 순간 복부에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 두 사람은 신문의 타살을 찬성하는 데 서명하고야 말았다.”

통합 대상이었던 경기일보 곽인성 사장과 김응태 부사장은 이렇다 할 증언을 남긴 것이 없으나 오세태 당시 편집차장은 '인천언론사'에서 “마침내 죽는 날이 왔다. 우리의 명이 다하고 죽고 싶은 날이 아닌 죽어 주는 날이다 … 지령 2334호를 마지막으로 작별하려 합니다 …. 용서하십시오.” 1973년 8월31일 경기일보 종간호에 실린 오세태 차장의 폐간의 변이다.

그 전인 1973년 7월31일 '합의'에 따라서 인천 올림포스호텔에서는 '경기 지방 3개 신문사 통합 기념행사'가 열렸다. 말은 언론 창달을 위한 3사 통합대회였지만 이를 취재해 보도한 신문은 수원의 연합신문뿐이었다.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는 보도할 이유가 없었다. 경기매일신문은 폐간 직전인 그해 8월 10일 공교롭게도 지령 '9000'호를 맞게 되었다.

당시 경기도 내 신문 사상 최고의 지령 9000호에 울분을 토해내듯 경기매일신문은 대대적인 특집을 꾸며 그들의 마지막을 장식했는데, 필자는 '빛의 활자를-'이라는 제목의 9000호 기념시를 게재했다.

“문선공의/손에서 푸들 푸들거리는/활자, 활자들/바르게 짜이는/오늘의 면/맥박 힘차게/윤전기가 달린다/이것은 진실/이것은 정의/이것은 증언//낱낱의 활자는 살아 있다/더러는 거꾸로 박혀 있는/일상의 오자(誤字)들/단호히 핀세트로 뽑아 올린다/우리들 깊은 내부의/가난한 자리를 밝히는 반딧불./빛으로 쌓이는 면마다/번지는 싱싱한 잉크 향기를 맡으며,/9000의 진실을 위해,/9000의 정의를 위해,/9천의 증언을 위하여,/오늘을 문선하고,/오늘을 조판하고,/오늘을 인쇄하는,/손은 살아 있다”

“비바람 부는 캄캄한 날/지천이 흰 비둘기 나는 날/어느 때나, 가장 깊고 따뜻이/들리는 천부의 명령./이 의무의 소리,/이 권리의 소리,/이 자유의 소리,/실로,/불사조의 노래를/진지하게 한 시대의/윤전기에 건다/오늘은 오늘의 페이지/푸득이며 깃드는 활자는/누구도 범할 수 없는 빛이다./내일의 아침을 묵묵히 여는/문선공의 손이여,/세상에 잊혀져도/이 노동은 우리의 것/빛의 활자를 뽑는다.”

유신의 칼에 비록 신문은 폐간되더라도 우리의 노동은 뜻 깊었고, 또한 길이 기억될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오늘 인천일보가 다시 9000호를 이었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예사롭지가 않다. 언론이 바로서야 지역이 살고,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인천일보가 길이 지령(紙齡)을 지켜 역사의 증언자로서 우뚝 서야겠다.

 

 

주필 조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