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은 부산, 광양, 평택 등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항만이지만, 항구가 들어서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 조건을 가지고 있다. 조수의 차가 최대 10m에 달하는 데다 수심도 얕아 선박이 내륙에 접안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런 탓에 예로부터 제물포를 제외하고 이렇다 할 포구가 발달하지 못했다. 한반도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는 근대기 인천을 개항장으로 만들었지만, 대형 선박의 정박이 불가능한 열악한 지형 조건은 인천항이 항구로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개항 후 부두와 접안시설 등을 갖추어 갔지만, 큰 배는 팔미도 근처 먼 바다에 정박한 채 조그만 삼판선으로 여객과 화물을 실어 날라야 했다. 이러한 인천항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했던 시설이 '갑문(閘門)'이다.

갑문은 물 높이가 다른 두 개의 수면 사이를 선박이 안전하게 통행하도록 만든 시설이다. 수에즈, 파나마 운하 등 세계적인 운하는 갑문을 통해 두 바다의 서로 다른 물높이를 극복했으며,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우리 서해에도 아라뱃길과 인천항, 북한의 남포에 갑문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인천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갑문이 설치된 곳이다. 개항 후 몇 차례에 걸친 매립을 통해 항만 시설을 확충했지만, 항구로서 치명적인 약점인 낮은 수심과 조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인천항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이중 갑문식 도크의 건설이 결정된 것은 한일병합 직후였다.

조선총독부는 공사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한 뒤, 1911년 6월11일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들어갔다. 7년이 넘게 계속된 축항 공사에서 철제 갑문 제작, 전기 장치 시설 등 주요 공사에는 일본인 기술자가 투입되었지만, 갯벌 굴착 등 단순 노역에 동원된 인부는 대부분 조선 사람들이었다. 1918년 10월27일 조선 총독이 참석한 가운데 이중갑문이 설치된 새로운 인천항의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배가 정박하는 공간인 선거(船渠)는 길이 454m, 폭 218m의 규모에 언제나 8~10m의 수심을 유지하게 되어 4500t급 선박 세 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었다.

당시 신축된 인천항의 가장 중요한 시설은 선거의 수심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역할을 했던 이중 갑문이다. 바다와 선거 방향으로 각각 한 쌍씩 설치되어 이중 갑문이라 불렀는데 높이 14m, 폭 10m, 두께 1.2m의 거대한 철조 구조물 두 개가 한 쌍의 갑문을 이뤘다. 바다 쪽 갑문과 선거 쪽 갑문 사이로 길이 109m, 폭 18m 공간을 두었는데 선박이 갑문을 거쳐 여기에 들어서면 물높이를 바다, 혹은 선거의 수심과 같도록 조절해 조수와 상관없이 대형 선박이 드나들 수 있게 하는 원리였다. 이중갑문식 선거가 준공된 후 인천항은 물동량이 세 배 이상 증가 하는 등 산업항으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1918년 이중갑문식 선거로 건설된 인천항 항만시설은 1960년대까지 그대로 사용되었다. 1935년 8000t급 선박의 정박을 목표로 시작된 제2선거 건설공사가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며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개발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고 있던 1967년 제2도크 건설 대신 5만 t급 선박의 입출항이 가능한 내항 전면 도크화 계획을 수립하고, 공사에 들어가 1974년 5월 준공을 보았다. 새로 건설된 인천항은 소월미도에서 연안부두 일대를 매립해 생겨난 8개 부두로 구성되어 엄청난 규모로 확장되었다. 인천항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갑문의 위치가 소월미도와 월미도 사이로 옮겨졌고, 개폐방식은 여닫이에서 미닫이로 바뀌었다. 크기도 확대되어 두 개의 이중 갑문에 각각 5만 t급과 1만 t급의 선박이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갑문은 인천항이 항구로서 기능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2000년대 매립을 통해 남항, 북항, 신항이 새롭게 건설되면서 내항의 기능이 점차 외항으로 옮겨가고 있다. 내항 전체가 시민의 품으로 반환될 날도 머지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날이 오면 갑문 역시 그 쓰임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세기 넘도록 인천항을 산업항으로 기능하게 했던 '갑문'의 역사적 가치는 잊지 말아야 하겠다.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