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만명 실사·국내 답사 벅차
현재 연구자 손꼽을 만큼 초라
추모 단체 '학술회의'가 전부

한말 투쟁·정신이 국군 모태
고조선 역사 … 가장 우수한 특성
역사·주체성 후손에 알려야

지자체 -대학 '관·학 협력'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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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인 이태룡 박사는 “현재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한말 의병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하는 곳이 없다”며 “지방정부 차원의 독립적인 의병연구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한말(韓末) 의병에 대한 첫 정리는 1960년대부터 이루어져 1970년 당시 원호처에서 <독립운동사> 1권 <의병항쟁사>를 발간했고, 이듬해부터 <독립운동사자료집>을 통하여 1000여 명의 재판기록을 <의병항쟁재판기록>으로 간행했습니다. 그 후 아직 정부 차원의 의병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있고, 현재는 국가보훈처에서 의병 포상과 함께 자료를 수집 중입니다.”

'호국의 달' 6월의 첫날인 6월1일은 의병의 날이다. '의병의 날'은 의병의 역사적 가치를 일깨워 애국정신을 계승하고자 제정한 법정기념일로, 2010년 2월 국회에서 의결되었고 2010년 5월 공포했다.

이태룡 박사는 1986년부터 의병연구를 시작한 뒤 경상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내 처음으로 의병문학인 '의병가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특히 저서 <한국근대사와 의병투쟁>(1~4권)과 <한국 의병사>(상·하권)는 의병연구의 역작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지금까지 3000명이 넘는 독립유공자를 발굴하여 포상신청을 해오고 있다.

이 박사는 “국가보훈처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의병연구는 미흡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데 이에 대한 대안으로 광역자치단체나 기초자치단체에서 지역의 대학과 협력관계를 맺거나 별도의 의병연구기관을 설립해서 의병장과 의병활동에 대한 연구를 더 늦기 전에 시작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의병(義兵)이란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민중이 스스로 일어나서 싸우는 구국의 민병(民兵) 또는 정의의 민병이라는 이 박사는 고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의병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역사, 문화, 국민성 등에 나타난 가장 우수한 특성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 박사는 한말의병의 투쟁과 정신은 일제강점기 독립군과 광복군의 독립운동에 이어 오늘날 국군의 모태가 된 역사성과 주체성 등을 후손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말 의병은 1894년 7월23일 일제가 50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경복궁을 침범하여 조선의 국왕과 왕비를 생포하고, 그들 앞잡이 내각을 세워 청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의병이 이듬해 일본 군경과 자객이 다시 궁궐을 침범하여 왕비를 참살하고, 이어 국왕의 머리를 강제로 깎은 후 단발령을 내리자 '국수보복(國讐報復)'(나라의 원수를 갚자)의 기치로 일어선 의병을 전기의병이라 하고, 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킨 후 우리나라에서 군율통치를 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려 하자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해 일어선 의병이 후기의병입니다.”

이 박사는 30만명으로 추정되는 한말 의병에 대한 연구는 일본 군경의 의병진압 상황과 맞물려 있어 그 연구가 어렵고, 그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고 밝혔다.

“전기의병은 1894년 9월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많은 의병이 순국하거나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고, 후기의병은 러일전쟁 때부터 일어나서 을사늑약과 군대해산 이후 활동이 본격화됐습니다. 의병에 관한 기록은 의병장이 남긴 일기나 문집, 관군의 기록,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남아 있으나 그 이름이 드러난 것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일제의 의병진압 기록도 1907년 8월부터 시작되고, 재판소 설치도 1908년 8월 1일부터 바뀌게 됐는데, 그 기록들이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판결문은 1만9167건인데, 현재 5818건만 공개되어 있어 그 전모를 살펴보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지역별로 보면, 전기의병이 강했던 지역은 진주·춘천·충주·홍주(홍천) 등 당시 관찰부 중심의 도시지역이었고, 후기의병은 농어촌·산촌 지역까지 확대됐습니다. 현재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한말 의병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하는 곳은 없습니다. 단지 독립기념관에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를 설치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그에 따른 백서를 발간하고 있으며, 전국의 문화원에서 향토사 차원의 의병연구가 다소 이뤄지고 있습니다.”

의병연구를 위해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 등에 수차례 답사를 다녀온 이 박사는 의병연구의 안타까운 현실에 개탄했다.

“국내 전 지역을 답사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고 한말 의병연구는 30여만명의 의병에 대한 연구와 함께 일제의 <통감부문서>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일본 군경의 의병진압에 관한 문서철인 <폭도에 관한 편책>(122권)을 살펴봐야 하기에 한 개인의 힘으로는 연구를 완성해 내기란 벅찬 것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학자가 연구에 참여해야 하는데, 현재 의병연구자는 손꼽을 만큼 적습니다. 의병에 관한 논저는 기껏해야 근대사 연구 단체들이 의병을 근대사의 한 부분으로 여겨 특정인이나 특정 지역 의병에 관한 논문을 내고, 특정 의병장 추모 단체가 주도하는 학술회의가 전부인 상태이니, 참으로 초라하다 하겠습니다.”

/글·사진 여승철 기자

yeopo99@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