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미테랑(1924~2011) 여사는 14년간 프랑스 대통령으로 장기집권 했던 프랑수와 미테랑과 신념을 함께한 정치적 동지로 1986년 '프랑스 리베르테'를 설립해 인권과 사회적 약자의 보호에 앞장섰다. 미테랑 전 대통령이 숨진 후에도 인권창달과 인도주의적 행보를 계속해 이상적인 영부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필자가 파리특파원으로 있을 때 프랑스 미술전시회를 서울에서 연례적으로 개최하며 알게 된 제라르 보지오씨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니스의 명문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자동차로 세계일주를 하고 피카소와 샤갈 같은 거장들과도 교류하면서 작품 수집에도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대통령 부인 다니엘 여사가 프랑스 리베르테를 설립하면서 보지오씨를 사무총장으로 발탁했다. ▶1998년도 초에 보지오씨가 파리에서 전문을 보내왔다.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이 되는 해인데 인권신장에 애쓴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었고 국제적인 활동을 하는 인권 단체도 많은 한국에서 기념 행사가 없는 것이 의아하다는 내용이었다. 프랑스에서 근무하면서 인류 보편의 가치로 승화된 인권의 중요성과 인권신장의 당위성을 실감하고 있던 터여서 뜻있는 인사들을 규합하여 '인권선인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당시 미국계 PR회사 버슨 마스텔러의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단기간에 여러가지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강금실, 박원순, 신혜수, 이미경, 장명수, 조용환, 최영도, 최학래, 한상진(가나다 순) 같은 이론과 경륜을 갖춘 분들을 이사로 영입하여 합심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사를 선임하면서도 확실한 직업과 수입이 있는 분들을 영입했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보지오씨의 도움으로 1) 인권교육의 방향, 2) 인권미술전, 3) 인권 열린 음악회, 4) 제주 인권 국제회의, 5) 인권 자료집 간행 등의 사업을 순조롭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한시적이었던 기념사업위원회를 해산하고 80여개의 유수한 시민단체들과 대통령의 소망에 따라 1999년 말 한국인권재단을 출범시켰다. 2005년까지 6년간 인권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고 있으면서도 필자는 미국계 PR회사에서 보수를 받으며 인권재단에서는 무보수로 봉직했고 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재단 실무자들에게는 급여를 지급했지만 임원들의 자원봉사는 인권재단의 전통으로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정의기억연대의 실상을 보면서 시민단체 대표 자리가 치부와 출세의 자리로 둔갑한 것 같아 안타깝게 느껴졌다.

 

언론인 신용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