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오.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상처와 고통을 표상하는 '가시'와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표상하는 '장미'. 이 둘을 소재로 삶과 존재에 대해 노래하는 시쯤은 흔히 있다.

그러나 이 시의 가치는 무엇보다 첫 연, '눈먼 손'에 있다. 손에는 눈이 없다. 그러니 눈먼 손으로는 꽃을 볼 수 없다. 당연하게도. 손에 눈이 없다는 것은 모든 감각을 오로지 손에만 집중해야 함을 말하고, 이는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 전제가 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눈먼 손으로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는 행위는, 삶의 굴곡과 고통을 자각하는 일인 동시에, 그 가시 위에 피어 있을 꽃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품는 것이다. 그러나 만져지는 것은 '가시투성이'이고 (설령 꽃이 피더라도) '꽃'은 (결코) '볼' 수 없다는 것. 왜? '눈먼' 손이므로. 그러므로 사실상 '장미'와 '가시'는 서로 구분이 되지 않는 내 몸의 얼룩들이다.

우리 삶의 비극성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시인은, 삶이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질문한다. 하지만 '눈먼' 손이기에 고통은 희망이 될 수 있고, 희망 또한 고통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삶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다.

/강동우 문학평론가·가톨릭관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