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계양의 변두리에 사방으로 나 있으나, 한 면만 육지에 통하고 세 면은 다 물이다. … ”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1168∼1241년)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제24권 '계양망해지'(桂陽望海志)에 나오는 글이다. 계양부사를 지낸 그가 계양산 봉우리에 올라 서해를 조망하며 감흥을 적었다. 고려시대 때까지만 해도 계양산 주변은 지금처럼 육지로 볼 수 없었다. 고려시대에 물가였던 계양산 일대는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 온통 개간되면서 육지화했다고 여겨진다. 이규보 글에 나타나듯, 계양산에 오르면 사방이 내려다 보인다. 이러니 지역을 지키는 데 매우 유리한 고지였을 터이다. 여기에 산성을 축조해 방어선을 구축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했다.

삼국시대엔 한강 유역 쟁탈전이 치열했다고 역사에선 기록한다. 신라·고구려·백제는 영토 확장을 위해 한강 일대를 차지하느라 뜨겁게 싸웠다. 한강 하류와 서해가 만나는 계양지역에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이곳을 소유한 나라는 계양산에 성을 쌓아 나갔다. 계양산성(桂陽山城·계양구 계산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산성은 계양산(394.9m) 동쪽 능선에 자리를 잡고 있다. 돌을 쌓아 만들었다. 오랜 역사를 알리듯, 고산성(古山城)으로도 부른다. 1992년 인천시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됐다.

얼마 전 이 계양산성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돼 눈길을 끈다. 1997년 첫 발굴 조사를 시작한 지 23년 만이다. 문화재청은 “계양산성이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성곽의 발달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백제 때부터 계양산성이 한강 유역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계양산성은 문화재청에서 최종 고시하는 대로 국가 문화재로서 효력을 지닌다. 산성에 대한 관리는 국비 지원을 받는 계양구에서 맡는다.

계양산성에선 '논어'를 적은 '백제 목간'도 발견됐다. 한반도에 한자와 유교경전 보급을 입증하는, 무척 오래된 유물 가운데 하나다. 한성백제 시대인 400~480년 사이에 만들어진 13.8cm 길이 목간이다. 5각형의 한 면엔 '오사지미능신(吾斯之未能信·저는 아직 벼슬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란 논어 공야장의 한 구절이 쓰여 있다. 당시 식자층에선 이런 유교문화를 활발하게 도입해 학습했다는 사실이 엿보인다.

계양구는 국가사적 지정에 따라 1184m에 이르는 계양산성의 성곽과 주요 시설을 복원하기로 했다. 1000여점의 출토 유물과 복원 모형, 3D 영상 등을 갖춘 계양산성박물관도 곧 문을 연다. 구는 계양산성을 연계한 여러 역사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계양구가 이를 계기로 '역사문화도시'의 기틀을 마련해 나가길 바란다. 국가사적 지정·복원과 함께 계양산성이 '삼국시대 위상'을 되찾았으면 싶다.

 

이문일 논설위원